9일 개막한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소설가 마거릿 미첼의 소설과 비비언 리·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동명 영화(1939)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 라이선스 작품이다. 이들과 장르가 다르니 기존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원작의 매력뿐 아니라, 뮤지컬만의 장점도 보여주지 못했다.
뮤지컬에 대한 기대치는 크게 3가지다. 우선 미국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프랑스적으로 풀었느냐.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이 주된 배경이다. 이야기 뼈대는 그대로 가져가되, 형식은 프랑스적으로 풀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처럼 프랑스 뮤지컬은 노래하는 배우와 댄서가 분리됐다는 주된 특징이다. 등장인물 또는 극의 감정을 대신 춤으로 표현하는 무용수가 있다. 현대무용뿐 아니라 비보잉까지 끌어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 같은 특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부재 탓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4시간인데 반해 뮤지컬은 2시간30(인터미션 20분 포함)이다. 압축이 심하다 보니 생략이 많이 됐다. 맥락이 끊긴다.
‘레드 버틀러’가 ‘스칼릿 오하라’를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 영화나 소설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다. 두 사람의 사랑을 부각해주는 ‘애슐리 윌크스’와 ‘멜라니 해밀턴’의 비중은 미미하다. 이에 따라 수차례 반복되는 키스 신은 전율이 없고 스칼릿의 마지막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등 명대사는 허공에 날릴 뿐이다. 버틀러가 스칼릿의 허리를 꺾어 키스하는 모습 등 영화 속 명장면이 겹쳐지는 부분은 꼭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처럼 느껴진다.
이에 따라 두 번째 기대치였던 스칼릿의 성장담도 흐지부지됐다. 제 잘난 맛에 살다가 전쟁 등의 역경을 딛고 점차 진취적인 여성으로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짝사랑하는 애슐리만 바라보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애슐리가 죽어가는 아내 멜라니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사랑이 허울 뿐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은 너무 급작스럽다.
또 그녀가 왜 예전 영예와 부를 누릴 때 살던 농장 ‘타라’에 집착하는지도 개연성이 부족하다. 적극적인 이미지가 강한 뮤지컬배우 바다(최성희)가 스칼릿을 연기하더라도 힘에 부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해지던 평등(노예 해방) 등 원작의 메시지 역시 휘발된다.
마지막 기대치였던 광활한 무대. 스칼릿이 하늘로 치솟을 때 그녀를 받치던 ‘스테이지 플라잉 로봇’ 등이 인상적이었으나 이미 호사스런 무대로 눈높이가 높아진 국내 관객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는 힘들다.
버틀러 역 주진모의 기량 역시 아쉽다. 데뷔 15년 만에 첫 뮤지컬 작품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택한 그는 이미지상 최고의 버틀러였다. 선굵은 외모와 나쁜 남자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속으로는 순정파인 버틀러는 그간 작품에서 쌓아온 주진모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데뷔작이라 기대치를 낮췄음에도 ‘안으로 먹히는’ 발성과 음정이 조금씩 엇그나는 노래 실력은 극의 중심축으로는 부족했다.
안정적인 구석도 있다. 뮤지컬 ‘미스사이공’의 비운의 커플인 마이클 리·김보경이 그중 하나다. 애슐리·멜라니 역으로 다시 슬픈 인연을 맺은 이들은 출연 분량은 많지 않으나 가창할 때만큼은 존재감이 뚜렷하다. 쉬지 않고 움직여 고생이 느껴지는 앙상블과 이를 이끄는 노예장 박송권은 극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번이 아시아 초연이다. 개작 가능성이 있는 만큼 별 반개를 더 한다. 공연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영화 주제곡인 ‘타라의 테마(Tara’s Theme)’를 삽입했다.
2월15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오페라극장. 버틀러 임태경·김법래, 스칼릿 소녀시대 서현, 애슐리 정상윤, 멜라니 유리아, 마마 정영주·박준면, 노예장 한동근, 프로듀서 박영석, 연출 유희성, 음악감독 변희석, 안무 서병구, 무대디자인 서숙진, 조명디자인 구윤영, 의상디자인 조문수. 5만~14만원. 쇼미디어그룹. 070-4489-9550
원작도 뮤지컬 매력도 못 살린 ★★★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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