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는 어떤 분을 뵐 기회가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미국인과 결혼한 후 한인 커뮤니티와는 거의 단절된 채 살아왔다는 그 분의 이런저런 소회를 듣고 있노라니 그 분의 60년대식 한국어 구사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예를 들면 ‘목간통’이니 ‘변소’ ‘예배당’ 같은 단어들은 실로 수십 년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목간통이 뭔지 모를 것이다. 혹시 변소나 예배당은 알아들으려나?시대가 변하면서 언어가 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수십년 만에 근대화를 이룩하고 IT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들이 인터넷에서 쓰는 약어나 속어는 차치하더라도, 요즘은 기성세대들이 쓰는 인사말에서조차 내가 한국을 떠나왔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간혹 한국 드라마를 보면 회사에 출근하면서 동료들끼리 “좋은 아침”이라 인사하거나, 헤어질 때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사도 미국식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시대를 살아왔으니 새삼스레 이를 아쉬워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한국어의 높임말 체계가 너무 복잡하여 관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고, 또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안녕 하세요”라는 인사는 오래 전 굶주림과 변란이 만연하던 때 “무사하냐”는 뜻으로 안부를 물었던 가슴 아픈 유래를 갖고 있어 요즘의 ‘미국식’ 인사는 즐겁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반대로 불쾌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온 인사도 있었다. 바로 어느 광고 카피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부자 되세요”였다. 2001년 12월 말부터 방송된 이 광고는 당시 IMF의 긴 터널을 지나온 한국 국민들의 가슴에 그대로 날아가 꽂히면서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온 국민이 합창하다시피 한 이 새해 덕담은 내게 “부자가 되기 위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음험한 경고같이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내가 새롭게 곱씹고 있는 인사는 최근 부쩍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행복 하세요”란 덕담이다. “부자 되세요”만큼 충격적이거나 불쾌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개운하지 않다. 내 기억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오래 전 가난했던 시절에는 생존에 급급하여 적극적으로 삶의 질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기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행복 하세요”란 인사 대신 “평안 하세요”란 인사가 많이 쓰였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행복 하세요”란 인사보다는 “평안 하세요”란 인사가 더 좋다. ‘평안’이라는 단어에는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나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일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행복’이란 단어에는 반드시 무언가를 갖추고 있거나 행하고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하면 널찍한 정원이 딸린 근사한 교외 주택에 젊고 잘생긴 부부, 인형같이 예쁜 아이들이 떠오르지만, ‘평안한 가정’이라 하면 집이 그렇게 근사하지 않아도, 부부와 아이들의 모습이 그리 예쁘지 않아도, 서로가 ‘사랑한다’는 닭살 멘트를 자주 날리지 않아도 푸근하고 소박한 사람냄새 나는 가정이 연상된다.
이는 아마도 행복의 이미지가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며 소비되어 온 탓일 것이다. 행복에 대한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소비하게 만들고 남들과 비교하게 만들어 종국에 가서는 지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올 한해도 ‘행복’을 꿈꾸기 보다는 ‘평안’을 꿈꾼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덤덤하지만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 이것이 내 새해 소망이고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새해 인사이다. 독자 여러분, 모두 무탈하시고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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