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정 국무위원 김철 선생 장녀
▶ 김미경 여사 어린시절 기억 생생
김구선생이 써준 휘호 가보로===“해방이 되는 그날 꼭 조선군함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자던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모진 고문을 견디며 일생을 바친 조국 광복을 끝내 보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고통스러웠던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해방을 맞은 지 69돌이 됐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그날이 열린지 어언 69년이 지났지만, 애국지사들의 뜻과 정신은 아직도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매년 광복절이 되면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중국에서 눈을 감은 부친 일강 김철 선생을 추억한다는 김미경(85) 할머니는 “내가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시간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남아 있다”고 부친을 회고했다. 김 할머니에 따르면 일강 김철 선생은 1886년 전라남도 함평군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의 서울대 법대인 경성대 법부 법관 양성소를 졸업한 후 1915년 일본 메이지 법대를 졸업했다. 귀국 후 집안 노비들의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소작인들에게 농토를 나눠준 뒤 일제통치에 협력해 달라는 갖은 조선 총독부의 회유와 협박을 단호히 뿌리치고 1917년 상해로 망명,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처분한 가산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댄 김철 선생은 초기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에 큰 역할을 했으며 도산 안창호,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또 1932년도에는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는 데도 참여했으나, 이후 일제의 고문과 격무로 인한 급성폐렴으로 중국 항주 광자병원에서 1934년 48세로 별세했다.
이처럼 6세 때 부친을 사별한 김 할머니는 당시 너무 어려 아버지가 하신 말 중 기억하는 말은 단 하나뿐이라고 했다. “‘꼭 해방이 되면 조국으로 조선군함을 타고 함께 건너가자꾸나’ 하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셨는지 어리지만 느낄 수 있었다”고 김 할머니는 전했다.
한국 정부는 김철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 중국에서 병원을 운영했던 김 할머니의 모친 최혜순 여사도 역시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조달한 독립운동가로 공적이 인정돼 지난 2010년 건국훈장에 추서됐다고 김 할머니는 전했다.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9세 때 모친과 함께 조국으로 건너와 18세 때 해방을 맞이한 뒤 고려대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해 고려대 최초의 여성 졸업생이 됐다고 한다. 이처럼 학문에 재주가 있는 김 할머니를 위해 김구 선생이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문구를 담은 작품을 써줘 보물 중 하나로 간직하고 있다고 김 할머니는 밝혔다.
김 할머니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1986년 도미했지만 1999년 전라남도 함평에 일강 선생 생가 복원 및 기념관이 설립된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박주연 기자>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일강 김철 선생의 장녀 김미경(맨 오른쪽) 할머니가 두 아들 및 외손녀들과 함께 김구 선생이 써준 휘호와 부친의 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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