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휴양지 푸껫에서 황당하면서도 비애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30도가 넘는 숨이 막힐 듯한 더위에 시커멓고 두꺼운 부르카를 뒤집어쓴 두 명의 이슬람 여인이 어렵사리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두 여인의 남편들은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라도 된양 완전무장한 두 여자는 한 손으로는 머리에 뒤집어쓴 니카브(얼굴가리개)를 살짝 들어 다른 한 손으로 음식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있었다. 음료는 들이킬 수 없으니 빨대를 이용해 겨우 쪽쪽 빨아들일 뿐이었다. 도대체 눈 부위까지 망사로 가린 저 겹겹의 복장 아래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오랜 내전이 이어지고 여성이 교육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까지 차단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인 탈레반 세력이 활개 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겪는 삶은 어느 지경인 것일까. 여성의 인권은 아예 인정받지 못하고 강간을 당하거나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잔인하게 명예살인을 당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여성은 그저 남성의 소유물일 뿐인 이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3일 개봉하는 아프가니스탄·프랑스·독일·영국 합작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은 그 속사정을 한 여인의 독백으로 조금씩 들춰낸다. 젊은 ‘여인’(골시프테 파라하니)은 식물인간이 된 남편(하미드 자바단)과 두 아이와 함께 전쟁통에 남겨졌다. 피란을 가지 못하고 전투를 피해 지하에 파놓은 작은 방공호에 겨우 몸을 피할 뿐인 이 여인은 두려움과 고독을 이기기 위해 의식이 없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화는 그 여인이 처한 현실과 살아온 인생, 다른 여인들이 살고있는 참혹한 삶이 그녀의 입을 통해 줄줄이 드러낸다.
어머니와 딸들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는 메추라기 싸움판 노름빚을 대신해 열 두 살 난 여인의 언니를 마흔살 남자에게 내준다. 이모(하시나 부르간)는 아이를 낳지 못하자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부모집으로 보내지는데, 그녀가 불임이라는 것을 안 시아버지는 매일 밤 그녀를 강간한다. 시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친 이모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차단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 매음굴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이젠 머리가 허옇게 세고 대머리가 된 늙은 남편이 전쟁영웅으로 활약하는 동안 그의 사진을 옆에 놓고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시어머니는 그녀의 순결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한방에서 그녀를 지키고, 시동생 중 하나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를 차지할 셈으로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며 헐떡거리곤 했다. 처녀성을 확인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말 한마디 없이 덮치는 남편과 첫날밤을 보낸 여인. 여인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토해낸다. 처녀였지만 혈흔이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해 생리혈로 속인 것이다. 게다가 아이가 생기지 않자 버림받고, 친정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역질이 났지만 씨내리를 이용해 딸 둘을 낳았다.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을 한 아군과 싸우다가 목에 총을 맞은 남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굴었지만 이들 동네로까지 전투가 번지자 다른 아들들과 함께 도망을 가버렸다. 아직 남편이 살아있기에 여인은 그냥 남겨둔 채로. 물장수도 오지 않는 집에서 돈이 떨어져 링거액을 구할 수 없자 설탕물을 타 튜브로 영양공급을 하며 버틴다. 시야확보가 잘 안 돼 넘어지게 만들기 일쑤라는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을 이모에게 맡긴 채 남편을 부양하기 위해서 동동거린다.
영화는 거의 여인의 혼잣말로만 구성됐다. 가끔 전쟁 중임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나 연극무대처럼 대부분의 일들이 남편을 눕혀 놓은 집안에서 벌어진다. 영화의 구성은 단순하다 못해 투박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여인의 대사로만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이다. 현대판 세헤라자데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아랍인들은 진즉에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세헤라자데는 페르시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아랍어로 기술한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의 화자이다. 고대 이란 사산왕조의 샤푸리 야르왕이 왕비에게 배신당한 분노로 신부를 맞이한 후 첫날밤만 보낸 후 죽여 버리기를 반복한다. 새 신부로 뽑힌 세헤라자데는 살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는 1,001일 동안 지속된다.
여인 역시 살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스스로를 달래고 치유하고 현재를 버티는 힘이 된다. 자신의 삶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며 분노를 넘어선 자기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모는 ‘인내의 돌’이라는 신비한 전설 속의 돌에 대해 알려준다. 그 돌에게 고통과 말못할 비밀을 말하고 그 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인은 남편을 인내의 돌로 삼고 모놀로그를 펼친다. 결혼 후 10년간 실제 산 기간은 3년 남짓, 입맞춤 한번 나눠보지 못한 아버지뻘 남편이다.
남편을 벽장에 숨겨놓고 은장도 같은 칼을 쥐고 버티는 여인의 집으로 쳐들어온 군인 둘. 여인은 몸을 파는 과부라고 거짓말을 해 겁탈을 피한다. 순결한 여자를 강간하면 더 강해진다고 믿기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몹쓸 짓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창녀로 오해한 젊은 군인(마시 음로와)이 다시 찾아오면서 또다른 사건이 시작된다. 길거리 고아였던 남자를 끌고가 밤에는 담뱃불과 총열로 지지며 학대하고 낮에는 전쟁터로 내몬 지휘관에 의해 말더듬이가 된 남자는 여인과 많은 것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위로받고 성애에 눈뜨게 된 것이다.
결말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남편의 억압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스스로 기적을 행한 선지자가 됐다며 자기 해방에 도달하는 여인은 구원받은 것일까. 영화는 가부장적 질서에 희생 당했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마르크스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야말로 사회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했다.
모노드라마 같은 극에서 여주인공 골시프테 파라하니(30)의 흡인력은 대단하다. 누추한 차림에도 가려지지 않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아름다운 얼굴은 처연함과 매혹을 오가며 관객의 시선을 끊임없이 사로잡는다. 지난 6월 국내개봉한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2011)에도 출연했다.
파라하니 역시 보수적 이슬람국가 가운데 하나인 이란 출신으로 무대감독이자 연극배우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14세 때 주연으로 데뷔한 영화 ‘배나무’(1998)로 테헤란에서 열리는 파지르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외화에서 여배우의 어깨만 드러나도 시커멓게 덧칠을 해 내보내는 이란의 풍토상 그녀의 자유로운 행보는 이란 당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고 전해진다.
2008년 영국 일간 더 가디언은 파라하니가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레오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한 할리웃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2008) 출연 이후 출국 금지명령에 처해졌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그녀는 뉴욕 프리미어에 참석해 뉴욕데일리뉴스에 “이란 관리들이 내 여권을 일시 압수했으며, 정보부로부터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파라하니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메이저 할리웃 영화에 출연한 첫 이란 여배우다. 이듬해 파라하니는 고국을 떠나 파리로 거주지를 옮겨 2003년 결혼한 제작자 남편과 살고 있다.
2012년 1월에는 프랑스 잡지 ‘마담 피가로’에 누드 사진을 싣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또 다시 이란 내에서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영국 일간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파라하니가 이란 관리들로부터 “이란은 당신 같은 배우나 예술가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은 다른 데서 예술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썼다.
감독 아틱 라히미(51)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파키스탄을 거쳐 1984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소르본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2000년 페르시아어로 발표한 첫 소설 ‘흙과 재’를 직접 영화화해 2004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상을 탔다. 자신의 네 번째 소설이자 첫 프랑스어 소설인 ‘인내의 돌’로 2008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이 한국에서 ‘어떤 여인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는 영화의 원작이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했으며 카불과 파리를 오가며 소설, TV, 영화를 넘나들고 있다.
<김태은 문화전문기자>
tekim@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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