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김일성 후계자 공식 내정된 후 실질 통치
▶ 김정일은 누구인가
생모 김정숙과 함께. / 유년기의 김정일 / 20대 청년시절의 김정일 / 노동현장을 방문, 근로자들과 함께 / 1980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직후 김일성 주석과. / 40대 국방위원장 시절.
17일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이후 수 십 년간 봉건시대를 능가하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부터 아버지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는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갔으며,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임을 내외에 선포한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37년간 북한을 통치해 왔다.
■ 불우했던 최고통치자의 아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1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조국 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최고 통치자의 장남으로 지위가 바뀌면서 행복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모성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에 이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 가족과 권력투쟁 불사 권력장악
김 위원장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축적과 자질향상, 김일성의 인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지내면서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의 정책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김일성의 신뢰 속에 김정일은 김정숙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인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나서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 ‘고난의 통치’시대… 미완의 변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의 모든 상황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와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고 얼굴 없는 통치를 이어갔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로 당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이를 통해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는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그대로 노출했다.
내부적으로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으며 경제적으로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하며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했다.
■ 김정일 연보
▲1941년 2월 = 백두산 밀영(양강도 삼지연군)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서 출생. ※러시아 연해주 태생설도 있음
▲1950∼52년 = 중국 지린학원 유학
▲1961년 7월 = 노동당 입당
▲1973년 6월 = 당 선전선동부 부장
▲1974년 2월 = 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오르며 후계자로 확정
▲1980년 10월 = 제6차 당대회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국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
▲1991년 12월 = 당 중앙위원회 제6기 19차 전원회의서 군 최고사령관에 임명
▲1992년 4월 = 군 원수 칭호
▲1993년 4월 =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
▲1997년 10월 = 당 총비서 추대
▲1998년 9월 = 국방위원장에 재추대
▲2000년 5월 = 최고지도자로서 첫 방중
▲2008년 8월 =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짐
▲2009년 4월 = 국방위원장 재추대
▲2010년 9월 = 제3차 노동당 당대표자회서 당 비서국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장에 임명
▲2011년 8월 = 러시아 극동지역 방문, 중국 방문
▲2011년 12월19일 = 17일 오전 8시30분 열차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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