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 초대석
▶ ‘기부왕’밝은미래재단 홍명기 이사장
내년 1월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치는 홍명기 이사장이 커뮤니티 봉사와 차세대 육성에 대한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은 호 기 자 >
자수성가하기까지
500달러 들고 유학 주경야독
51세에 창업… 굴지의 기업 키워
기부와 봉사의 삶
4.29 폭동 계기 인재부족 실감
교육사업 등에 600만달러 쾌척
■이민 역경 딛고 성공한 삶
성공한 기업가이자 사회활동가로서의 홍명기 회장이 걸어온 길은 자수성가한 이민자 1세의 삶의 전형이지만 이민생활에서의 굴곡에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는 게 홍회장의 말이다.
홍 회장은 한국에서 부잣집의 아들이었다. 부친 홍찬씨는 평화신문과 수도극장(스카라극장)의 사장이었고 동양 최대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한 영화인이기도 했다. 1954년 중앙고를 졸업한 홍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입학에 실패하자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단돈 500달러를 들고 유학차 도미한 것이다. 처음에 콜로라도대 화학공학과에 등록했다가 곧바로 UCLA 화학과로 전학,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10대 유학소년의 고생이 시작됐다. “목장에서 소를 몰고 젖을 짜기도 했고 베벌리힐스 유대인 집에 하우스 보이로 들어가 월급 30달러를 받았습니다” 주경야독의 생활이었다. 주인이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불을 못 켜게 해 손전등 아래서 책을 읽었다.
UCLA 마지막 학기에 와서는 도저히 학비를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학업을 포기하려 했다가 백인 여교수가 주는 200달러로 가까스로 학비를 내고 졸업을 했다.
전공을 살려 자동차 도료, 수지 등을 제조ㆍ연구하는 휘태커라는 회사에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탄탄한 미국생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홍 회장은 어느 날 ‘유리천장’이 있음을 실감하면서 또 다른 과감한 도전을 감행했다. 남들은 안정을 추구할 나이인 51세의 나이였다. 수중에 있는 2만달러를 들고 특수 페인트 생산업체인 ‘듀라코트’를 창업했다. 결국 20여년만에 연간 매출 2억달러,
미국시장 점유율 1위의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냈다. 홍 회장의 뚝심이 다시 한 번 빛났다.
■4.29 폭동, 도산 정신으로 깨우쳐
이렇게 성공한 사업가로 안주하던 홍명기 회장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992년 LA 4.29 폭동이었다. 홍 회장은 “4.29
폭동 소식을 보고 듣고‘ 그동안 비겁하게 뒤에서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며 “이를 계기로 역량이 허락된다면 동포사회에 나가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고했다.
4.29 폭동 때 한인사회는 불행 중 큰 기회를 가졌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LA 한인타운을 방문해 한인사회 구성원과 만난 것. 하지만 홍명기 이사장은 이때를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곱씹는다“. 당시 한인사회는 대통령에게 우리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는 홍 회장은 그 원인으로‘ 인재부족’을 꼽았다. 1세대들이 자녀교육에 열성이지만 정착 한인사회를 대변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차세대를 육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무실역행(務實力行), 충의용감(忠義勇敢)으로 자기계발과 민족의 미래를 이끌 인재육성을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앞으로 살 길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씀이죠. 한인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차세대를 제대로 교육해야 우리 위상도 높아집니다. 도산 선생의 정신이 저에게 민족의식과 사회봉사에 대한 자각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한 밑거름이 됐죠”
■기부의 삶 실천
이같은 봉사정신으로 남가주 한인사회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해 온 홍명기 회장의 업적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다른 근접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두드러진다.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하면서 1,0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는 통 큰 목표를 세웠던 홍 회장은 차세대 장학금 지금에 나섰고 리버사이드시 도산 안창호 동상 건립에 앞장섰다.
이에 앞서 1999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재직 시절에는 350만달러 기금모금에 성공해 폐교 위기에 몰렸던 학교를 살려냈고,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던 해에는 기념사업회 전국총회 명예회장을 맡아 행사 추진을 도왔다. 또 항일독립 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대한인 국민회관을 복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인사회뿐 아니라 주류사회에서도 한인 이민자를 대표하는 기부 전도사로 LA 카운티 미술관의 한국관 설립과 UCLA 코리안 아메리칸 석좌교수직 설치 등에 큰 기여를 했고 UC 리버사이드 대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민 1세대 책임의식 가져야
홍 이사장의 삶에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 한인사회 구성원과 차세대가 ‘자부심’을 갖고 미국 땅의 떳떳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민 1세대로서 나의 경험과 자산을 한인사회 발전에 보태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홍명기 이사장은 “이젠 1세대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미국 땅에 살아갈 우리 후손을 위해 원로들이 차세대를 지원하고 제대로 인수인계에 나서자”며 “이민 1세대들이 올바른 리더십을 갖고 모범을 보여 2세, 3세들이 미국사회에서 성공해 언젠가는 한인 이민사회에서 미국 대통령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한 홍명기 회장은 지난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또 다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것에 대해 “해외동포 750만명을 대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며 “남은 여생을 한인사회 차세대 육성에 힘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민 조상들의 삶을 보며 한인이란 자부심을 갖고 삽니다. 일구이언하지 않는 사람으로 제가 한 말을 지키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요. 차세대가 미국 사회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제 힘을 쏟겠습니다”
<김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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