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요스페셜: 인물 포커스
▶ 최영수 박사의 삶
만주출생 의대재학중 6.25 발발 군의관 생활
1954년 미 육군병원 연수 흉부외과 선구자
4남매 이끌고 미국행 모두 쟁쟁한 석학으로
83세의 노장 의사 최영수 박사는 자식 자랑하기 바쁘다.
유명 건축가 장남 프랜시스코, 여성 CEO 장녀 루시아, 하버드 의대 교수 차남 오거스틴, 바이얼리니스트 막내 애나 최. 이렇게 4남매 중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오거스틴 최(52·한국명 최명근) 박사는 하버드 의대 부속 브라이엄 여성병원의 호흡기내과 과장이다.
체내에서 발생된 일산화탄소의 세포 및 조직 보호 기능을 최초로 규명, 저농도 일산화탄소 호흡을 통한 새로운 난치병 치료법 개발을 선도한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지난 4월 2011년 호암상 의학상을 수상했다. 최 박사의 자식자랑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이민 온 1세대가 꿈꾸는 미래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10년 전 은퇴를 하고 발렌시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최영수 박사는 196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국 최초로 심장수술 성공’이란 제하의 기사 주인공이다.
<글 하은선 기자·사진 김지민 기자>
최영수 박사가 1962년 한국 최초의 심장 절개 수술을 성공했음을 알리는 당시 한국일보 기사.
# 실패가 있어야 성공이 있다
당시 소령이었던 최영수 박사는 수도육군병원에서 심장판막 확장수술을 집도해 아시아 최초로 심장절개 수술에 성공했다. 그의 나이 34세에 이룬 쾌거였다. 당시 그가 이룬 군의학계의 기념비적인 성과를 두고 1962년 5월 23일자 한국일보는 ‘수도육군병원은 인공심폐기와 열교환기를 사용한 저온마취법을 입체적으로 동원, 지난 17일 박제운 일등병(22)의 선천적 심장질환을 수술해내는데 성공했다. 인공심폐를 중심으로 하는 3자 입체적인 심장의 체외순환 수술은 우리나라에선 최초의 일로서 박군을 심장수술을 집도한 담당의는 최영수(34)씨였다’고 보도했다.
“1차 임상실험에는 실패했어요. 그 때의 좌절감은 연구를 중단하고 군 제대를 생각하게 했죠. 그러나 실패가 있으면 성공도 있다며 격려해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나를 믿고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준 상부의 지시로 다시 미국 덴버
로 날아갔죠. 심장수술 과정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차 수술 성공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최연소 의학박사, 심장수술에 성공한 최초의 아시안 심장전문의 등 의사로서의 명예를 과감히 포기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 시절 군부정권하의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였다는 것이 그가 미국 이민을 택한 이유였다. 그러나 1970년 필라델피아 나자렛 병원의 인턴 생활로 시작된 미국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 고생도 많이 하고 복도 많이 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0년이나 어린 후배들과 함께 인턴을 해서라도 미국 의사면허를 따야했죠. 1년 만에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병원에 노인의학 의사로 취직을 했지만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직장 세 군데를 뛰었습니다.”
쓰리잡 닥터. 더 이상 한국 최초로 심장수술에 성공한 유명한 흉부외과 전문의가 아니었다. 주중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주말이면 응급실 당직의사로 꼬박 60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또 그가 미국 의사로 23년을 일하게 해준 재
향군인병원도 찾아야 했다.
고맙게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잘 자라주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던 그는 마침내 1987년 심장 손상으로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서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받았다. 심장수술 전문의가 자신의 심장손상을 자각할 겨를도 없
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심장수술을 집도한 외과팀은 수술대에 누워 마취로 정신이 희미해진 환자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했다는 후문이 들리기도 했다.
“2005년 UCLA병원에서 대동맥판치환술(aortic valve replacement)과 바이패스 수술을 또 다시 받았습니다. 또 직장암 수술도 받고... 여든이 넘으면 건강에 개런티가 없어요. 그냥 지금 건강하니 열심히 살 뿐이죠”
# 아버지 뒤를 이은 석학 가족
회령에서 태어나 만주 용정에서 자란 최영수 박사는 해방 직후 의사의 꿈을 꾸며 홀로 서울로 내려왔다. 만주 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아들이기를 포기하고 서울대 의대(당시 경성제국대 의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군의관이 근무해야 했다. 육군 병원에서 실력과 패기를 인정받은 그는 1954년 콜로라도주 덴버 피시몬 육군 병원에서 흉부외과 연수를 받으며 당시 한국 의학계 미개척 분야였던 심장수술 연구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일본 심폐 권위자인 사가키 바라 교수에게 끊임없이 연구논문을 보내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5번째 연구논문이 사가키 바라 교수에게 채택되고 동경여자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을 받았다.
당시 한국 최연소 의학박사였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4남매는 물론 며느리, 사위까지 모두 석학들이다.
장남 프랜시스코 최씨는 뉴욕의 유명 건축회사 FTC 아키텍츠 앤 PC/Tamiro 벤처 LTD 사장으로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이다. 그의 아내 메리엔 최씨는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도미한 노인의학 전문의이다. 텍사스 주지사가 임
명한 휴먼 리소스 커미티 5인 중 한 사람의 노인 보건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녀 루시아 최 허씨는 켄터키 주립대 학사와 영국 런던 대학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성공한 사업가로 남편 존 허씨와 함께 케미칼 매뉴팩처링업체 HUR를 운영하고 있다.
차남 오거스틴 최씨는 루이빌대 박사학위를 수료하고 존스홉킨스대, 예일대, 피츠버그대 의대 교수를 역임, 현재 200여명이 넘는 브라이엄 여성병원 호흡기 내과 과장이다. 그의 아내 메리 최씨도 하버드 의대 교수로 신장 전문의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막내딸 애나 최씨는 신시내티 컨저버토리 오브 뮤직을 거쳐 줄리아드 음대에서 4년만에 석사학위를 받은 바이얼리니스트. 이태리 네이플 심포니 바이얼린 주자로 최초의 여성 콘서트마스터로 활약했고 현재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앤 최 인터내셔널 뮤직 스쿨 디렉터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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