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결방이다. 방송사들은 저마다 시청자가 주인이라고 외치지만 주인을 섬기는 태도가 미덥지 않다.
천재지변과 사고에 이어 이번에는 주연배우의 촬영 거부로 드라마가 결방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많은 드라마가 결방이라는 ‘폭탄 돌리기’를 지난 수십년간 해왔고 이런 사태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개선의 기미 보이지 않는 ‘생방송 제작’ = KBS 월화극 ‘스파이 명월’은 여주인공 한예슬이 14-15일 촬영을 펑크내자 방송 분량이 모자라 곧바로 15일 결방됐다.
한예슬은 아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나버렸다. 총 18회로 기획된 ‘스파이 명월’을 11회까지만 촬영한 채 나 몰라라 하고 촬영을 거부한 것이다.
KBS는 결국 16일 여주인공을 교체해 나머지 분량을 소화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후임자 물색에 나섰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또 그렇게 해서 겨우 마무리를 한다고 해도 KBS나 드라마로서는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됐다.
앞서 MBC 수목극 ‘넌 내게 반했어’는 여주인공 박신혜의 교통사고로 지난달 21일 방송이 결방됐고 지난 1월25일에는 SBS 월화극 ‘아테나 : 전쟁의 여신’이 남자주인공 정우성의 부상으로 방송을 타지 못했다.
둘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지만 그 여파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방송 차질로 이어졌다.
이렇게 한국 드라마에 결방이 빈번한 이유는 제작이 늘 아슬아슬하게 ‘생방송’(방송 직전까지 촬영해 겨우 제시간에 내보내는 드라마 제작시스템을 일컫는 말)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결방은 아니었지만 SBS ‘싸인’은 지난 3월10일 마지막회에서 화면 조정용 컬러바가 뜨고 음향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방송 사고를 냈다.
’싸인’은 아슬아슬하게 생방송 릴레이를 펼치다가 결국 편집 시간이 모자라 마지막회에서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내고 말았고, ‘아테나’나 ‘넌 내게 반했어’도 같은 이유로 생방송 체제로 촬영을 진행하다보니 배우의 사고가 곧바로 결방으로 이어지게 됐다.
한예슬의 경우는 데뷔 10년 이상된 연기자로서 자신의 부재가 곧 방송 차질로 빚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단으로 촬영 펑크를 낸 것이라 ‘불가항력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파이 명월’ 역시 생방송 체제로 촬영되다보니 그의 펑크가 곧 결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드라마 촬영현장에 사고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지만 국내 드라마 현장은 이처럼 사고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다. 사고 수습을 위한 조금의 여유도 갖지 못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인 것이다.
◇쪽대본 + 살인적인 스케줄 = 드라마의 생방송 제작 시스템은 쪽대본과 그에 따른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기인한다.
지난 7월 막을 내린 MBC 주말극 ‘내 마음이 들리니?’는 방송 내내 쪽대본에 시달려 배우들이 감정을 잡는 데 애를 먹었다. 앞뒤 설명없는 쪽대본으로 연기를 하려니 배우들은 어떤 상황에서 연기를 하는 건지 몰라 고생했다고 입을 모았다. 겨우겨우 방송이 된다해도 그 완성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KBS는 16일 한예슬 사태와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스파이 명월’은 다른 드라마 촬영과 비교해 쪽대본이나 살인적인 스케줄은 분명히 아니었다"고 강조하며 한예슬의 무단이탈이 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여기서 KBS가 ‘다른 드라마 촬영과 비교해’라고 전제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거의 예외없이 ‘생방송 체제’로 제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비교해 그래도 촬영 전에 완성된 대본이 나왔으니 ‘쪽대본’은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알 수 있듯 ‘스파이 명월’ 역시 주연배우가 하루 이틀 촬영을 펑크내자 곧바로 결방될 정도로 제작이 아슬아슬하게 이뤄지던 상황이었음은 분명하다.
배우의 짧은 부재가 곧바로 결방으로 이어질 정도로 국내 드라마 제작시스템은 후진적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개선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찍어야하는 드라마를 생방송 뉴스처럼 제작하니 사고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고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고는 있지만 거기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 개선할 것인가 = 드라마 생방송체제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해결책처럼 등장하는 것이 반(半) 사전제작이다.
방송 전에 최소한 절반 정도는 찍어놓아야 좀더 인간적인 환경에서 촬영할 수 있고 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방송사 편성, 협찬, 간접광고, 시청률 등 여러가지 문제로 한국 드라마의 생방송 제작 시스템은 사고의 폭탄을 안은 채 수십 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방송 전문가들은 사전제작이 정착되지 않는 원인으로 "한국처럼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라도 없는 데다, 한국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스토리에 자신들의 입김이 반영되길 강력하게 원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전제작을 하면 시청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시청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방송사들이 같은 이유로 사전제작 드라마의 편성에 소극적인 까닭에 한국 드라마는 ‘생방송 드라마’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회 사전제작을 통해 방송된 SBS ‘파라다이스 목장’이나 MBC ‘로드 넘버 원’과 ‘친구’ 등은 스타급을 캐스팅했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지만 모두 시청률에서 ‘실패’했다.
KBS 고영탁 드라마 국장이 16일 "대한민국 드라마 콘텐츠 제작 환경이 굉장히 열악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는 누구의 문제라고 단정지어서 얘기할 수 없고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이며 하루아침에 해결도 못한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고 국장은 "그러나 문제점은 분명히 직시하고 있으며 이의 해결을 위해 앞장설 의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대목은 없었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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