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 스프레처와 그녀의 두 딸 루파와 아이화가 루파의 피아노 교습장으로 향하고 있다.
스프레처 가족의 일과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새벽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에 제일 먼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폴라 스프레처는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실내등도 켜지 않은 채 두 딸과 남편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간단한 식사가 끝날 때쯤이면 벽시계가 7시15분을 알린다. 이 집의 벽시계는 라디오의 시보처럼 15분 단위로 시각을 일러준다. 이때부터 온 가족은 루파(10)와 아이화(6)를 학교까지 태워다줄 스쿨버스의 기척에 귀를 모은다.
장애인 부부, 같은 처지의 아동 인도·중국에서 입양
버스 탑승·동전 식별 등 생존법 가르쳐 자신감 고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 소리를 가장 먼저 잡아낸 루파가 벽에 기대어 놓은 흰 지팡이를 집어 든다. 아이화도 재빨리 장화를 찾아 신고 폴라와 함께 문밖으로 나선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시각장애인 가족 네 명의 길 찾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폴라 스프레처(49)와 그녀의 남편 알랜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이들이 입양한 두 딸 역시 앞을 보지 못한다.
스프레처 부부가 인도에서 루파를 입양한 것은 지난 2008년의 일이었다. 이어 다음해 1월에는 중국에서 아이화를 데려왔다. 폴라는 “시력을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우리 부부에게 시각장애아 입양은 지극히 정상적인 선택이었다”며 “장애아라는 이유로 버림 받은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프레처 부부는 두 딸에게 버스 타는 법, 크기와 무게로 동전 식별하는 법, 빨랫감 추리는 법 등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평생을 캄캄한 어둠속에서 살아야 하는 루파와 아이화에게 그들이 터득한 생존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다. 버스를 타면 정거장 안내방송을 유심히 들어야 하고, 양말은 세탁기에 넣기 전에 핀을 꽃아 미리 짝을 맞춰둬야 하며 페니와 니클, 다임과 쿼터의 크기와 무게가 다름을 숙지시켜 이들의 자신감과 독립성을 고취하는 산교육이다.
언젠가 루파와 아이화도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이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망망대해의 거센 물결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부모로서 스프레처 부부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다.
루파와 아이화는 보조교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정규학교의 정규반에서 공부하지만 급우들과 달리 점자 교재를 사용한다. 폴라가 이 학교의 교사라는 사실이 루파와 아이화에게 여간 힘이 되는 게 아니다. 학교가 끝나면 엄마와 두 딸은 나란히 집으로 향한다. 루파와 아이화의 집찾기 훈련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버스정거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폴라은 루파에게 지금 우리가 지나는 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다. 큰 교차로에 이르면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똑같은 ‘잔소리’가 이어진다.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정거장에서 버스를 내린 후
이번에는 폴라 대신 루파가 길잡이 역을 맡는다.
흰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방향을 잡아가던 루파가 오른쪽 길 모퉁이를 지나치자 폴라가 재빨리 딸을 정지시킨다. 실수한 루파가 시무룩해지자 폴라가 부드럽게 달랜다. “괜찮아. 이제 곧 익숙해질 거다. 넌 아직도 어리잖니.”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흰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세상을 더듬어내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이들에겐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와 풍경소리는 물론 보행로의 틈새까지도 방향을 일러주는 소중한 신호다.
스프레처 부부는 딸 들이 직면한 어둠이 이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부모의 격려에 힘을 얻은 루파는 요즘 유도와 조정, 도자기 만들기에 열심이다. 여름마다 하계 수련회를 가고 걸스카우트 활동에도 참여한다.
아이화 역시 자신에게 맞는 취미활동을 찾고 있다. 알랜은 “멀쩡한 몸으로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며 끊임없이 이들의 등을 떠민다.
스프레처 부부는 그들이 어린 시절에 갖지 못했던 기회를 딸들이 맘껏 누리기를 원한다. 폴라와 알랜은 결혼 후 선뜻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알랜은 “우리가 자식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자녀를 갖는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지난 2008년 우연한 기회에 해외 고아원 자선기금 모금행사에서 만난 수녀들로부터 인도 뱅갈로의 시각장애아 루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입양이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됐다.
“방학을 맞아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 학교 기숙사에 홀로 남겨진 루파가 아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늉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수녀들의 말이 폴라와 알랜의 마음을 뒤흔든 것.
루파를 통해 가족사랑에 눈 뜬 폴라와 알랜은 이듬해 선머슴처럼 씩씩한 아이화를 입양했다.
비록 서로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엔 가족’이지만 강물처럼 흐르는 이들 사이의 사랑은 풍성하고 따듯하다. 폴라가 ‘마음’으로 차려낸 저녁식사를 물린 후 두 딸은 목욕을 하고 이층 침실로 올라가 아빠를 기다린다. 알랜은 잠자리에 든 두 딸에게 매일 점자 동화책을 읽어준다. 뒤치다꺼리를 마친 폴라가 오늘은 루파의 침대로 파고든다. “누구?” “엄마” 짤막한 대화가 오간 후 모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이 잠든 후 알랜은 “이런 사소한 순간이 우리에겐 참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며 입가 가득 미소를 짓는다.
“루파와 아이화를 발견한 것이 정말 큰 행운”이라며 폴라는 두 딸의 볼을 더듬어 살포시 입을 맞춘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틀림없이 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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