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엄마요? 아니요, 저는 아니에요. 제 일과 생활이 중요하죠."
26년차 연기자 배종옥은 신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감독 민규동/이하 ‘세아이’)에서 맡은 인희라는 여인과 실제 자신의 차이점을 또박 또박 힘주어 밝혔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무뚝뚝한 의사 남편,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딸, 여자 친구가 임신했을까봐 걱정하는 재수생 아들 등 가족 뒤치다꺼리에 여념이 없는 지고지순한 엄마, 그 엄마가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남겨질 가족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내용이 이번 작품의 줄거리다.
배종옥이 맡은 엄마 인희 역은 1996년 MBC에서 방송된 4부작 동명 드라마에서 나문희가 맡았던 역할이다. 처음 민규동 감독에게 인희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땐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너무 높은 연령의 인물이라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원작자이자 절친 노희경 작가가 ‘세아이’의 인희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다는 사실과 암에 걸렸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고 고운 어머니의 모습을 그를 통해 그리고 싶다는 제안에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배우 출신 교수 1호’, ‘원조 차도녀’ 등 지적이고 차가운 현대 여성의 강한 이미지가 따라 다니는 그녀지만 ‘세아이’에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차분히 마지막을 준비하는 세심한 어머니를 힘을 쏙 뺀 연기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완성시켰다.
- 출연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나.
▲ 처음엔 거부했다. 내 나이에 비해 인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민규동 감독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지만 엄마의 모습이 초췌하거나 부스스한 게 아니라 곱고 예뻤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엄마 말이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수락하게 됐다.
- 극 중 인희는 가족들의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불평 한 마디 없다.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이렇게 착할 수 있나 싶을 만큼.
▲ 나는 그런 엄마가 아니다. 내 일과 생활이 중요하다. 하지만 원작자인 노희경 작가의 어머니가 극 중 인희와 똑같은 모습이셨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노 작가 어머님은 자식을 위해 무조건 헌신하는 모습이셨나 보더라.
암 투병 중 이가 몽땅 빠져도 고통을 호소조차 않으셨다더라.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도 가족에게 헌신하는 인희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했다. 노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며 극본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어렵지 않았다.
- 영화 속 지고지순한 어머니의 모습은 SBS 드라마 ‘호박꽃 순정’과 100% 상반되다.
▲ 겹치기를 절대 안하려고 하는데 이번 작품은 너무 욕심이 났다. 사실 관객들이 보기엔 영화 속 연기가 더 쉬워보여도 힘들지 않은 연기는 없다. 온 힘을 기울여서 한다. 보이지 않아도 인희의 아픔이 묻어나야 하고 병이 발견되고 심화되면서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 속에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매일 암 환자의 슬픔을 마음에 품고 연기했기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지만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 촬영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 이번에 기대치 않게 얻은 수확이 에필로그에서 남편과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에서는 사족 같았는데 촬영 땐 근사했다. 민 감독은 다 벗은 느낌으로 침대에 들어가길 바랐는데 갑수 선배는 다 벗고 나는 슬립을 입었다. 낯부끄러울 것 같아 고사했다.
"당신, 내가 없어져도 괜찮지, 내가 보고 싶을 것 같아?"라는 대화가 오간다. 실제 내가 죽을 때 남자든 딸이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어 김갑수와 두 번째 호흡이다.
▲ 내가 까다로워도 다 받아주시고 잘 융합됐다. 좋은 배우들과는 많이 얘기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 다만 김갑수 선배가 쉬는 시간마다 너무 웃겨서 감정 잡는데 애를 먹었다. 나는 감정을 많이 준비해야 하는 편인데 선배는 웃고 떠들다가도 슛만 들어가면 감정이 확 온다. 얄밉더라.
-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다가 남편과 화장실에서 오열하는 신이다. 노희경 작품에는 감정적으로 거짓말 하면 안되는 장면 많다. 모든 배우가 진실로 연기하겠지만 특히 노 작가 작품에는 진실로 접근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장면이 많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시어머니를 씻겨 주며 가족들 고생시키지 말고 혀 깨물고라도 하늘나라로 오라고 하는 장면도 힘들었다. 내 감정이 안 움직이면 아무 것도 안되는 장면이라 며칠 전부터 그 감정으로 살아야 했다.
- 암 투병 장면을 연기할 때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고 했는데.
▲ 어머니를 투영시키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암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내가 바라보던 느낌은 생생히 기억났다. 인희의 감정을 잡아가는데 도움이 됐다. 엄마의 모습을 모방하기보다 감정에 집중했다.
- 연기파 배우로 롱런한 비결이 뭔가.
▲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은 다른 조건 보지 않고 선택했고 그 다음엔 책임지려고 했다. 좀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데 남들이 옳다고 해도 내가 옳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았다.
내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에 잘 하는 것보다 도전하고 싶은 작품을 많이 한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또 미련 곰탱이처럼 무조건 열심히 했다. 남들은 쉽게 하는지 모르지만 난 정말 노력하며 지금까지 왔다. 어느 날 노 작가가 그러더라. "배종옥은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지"라고. 오랫동안 같은 작품을 한 작가가 이해해 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 드라마 작가들이 꼽는 캐스팅 1순위 배우다. 동료들로부터 질투도 따를 것 같다.
▲ 작품성 쪽에서는 내 쪽이 유리할지 몰라도 대중성은 내가 밀리는 부분이 많다. 그들이 날 질투할 리가 없지.(웃음)
- 과거 출연작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 드라마 ‘거짓말’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고 ‘바보 같은 사랑’은 공부하면서(석사 과정) 해서 또 좋아한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도 좋았다. 연출자인 박찬옥 감독이 홍상수 감독 조감독 출신인데 현장이 홍상수 감독 현장과 비슷했다.
내가 맡은 역이 밥 대신 술만 먹고 담배 피우고 목표 의식 없이 늘어져 사는 여자였다. 그 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 현장 가면 늘 술 먹고 그 인물로 살았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목표 의식 없이 산 적이 없는데 그 때 처음으로 한 번쯤은 무능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먹고 (술)마시면서 말이다.(웃음)
- 연기하며 쌓인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 마음공부를 한 지 7~8년 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108배를 한다. 내 생각을 글로 적기도 하고. 마음 운동을 하며 화로부처 많이 자유로워졌다.
-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나.
▲ 발레를 우연히 배우게 됐다. 헬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와 싸워야 하고 고통스러웠다. 발레는 음악을 들으며 하니 기분도 좋고 재미있다.
- 눈여겨보는 후배가 있나.
▲ 하정우가 좋더라. ‘용서받지 못한 자’ 때 배우적이고 남성성도 있어서 눈여겨봤다. 몇 년 새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라서는 것 보고 기뻤다. ‘추격자’와 ‘황해’는 못 봤다. 무서운 영화는 안 본다.
- 출연하고 싶은 장르가 있나.
▲ 중년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훌륭하게 성공했지 않나. 중년들이 꿈꾸는 사랑을 그리는 작품은 왜 안 나오는지 안타깝다.
- 10년 후엔 어떤 모습일까.
▲ 배우로서 뭘 모를 때 대선배들을 보며 "왜 쉬지도 않고 열심히 연기들을 하시나" 했다. 요즘 내가 그렇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 작품이 끝나면 앞으로 이런 역을 또 할 수 있을까 싶고 소중한 생각이 든다. 이번에 어머니로 나온 김지영 선배가 "종옥아, 건강해야 좋은 연기 많이 한다"라고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좋은 작품 안에서 빛나는 것이 내 목표다.
한국아이닷컴 모신정 기자 msj@hankooki.com
사진= 한국아이닷컴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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