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서 아버지 기록 찾아내고 ...죄송했고 그리웠지요”
이해경씨의 방에 놓인 책장 뒤로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사진이 보인다.
조선황실의 마지막 공주 이해경씨가 뉴욕 맨하탄에 산 지도 50년이 넘었다. 한국은 얼마전부터 일제 식민사관으로 폄하된 고종과 의친왕이 재평가 되고 있다. 이 고종황제를 ‘할아버지’, 의친왕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해경씨, 서구열강들의 탐욕 속에 속절없이 스러져간 왕조의 험난한 역사를 몸소 겪어야 했던 이해경씨가 지나온 삶을 이야기 한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되면서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519년 만에 망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왕족들은 신분을 벗어버리고 평범한 백성이 되었다.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구황실 재산관리법을 제정, 모든 토지재산을 국유지로 편입했고 몰락한 왕실의 자제들은 권력자와 사기꾼에 의해 이용당하고 거리로 나앉았다. 1955년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실의와 울분 속에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고 그 다음해인 1956년 그의 딸 이해경(李海瓊)은 미국으로 떠났다.
“다시는 모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부진 결심으로 미국에 온 지 54년이 흘렀다.맨하탄 컬럼비아 대학 인근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이해경(82)씨는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고종의 비자금 및 독살설 증거, 여자와 술로 점철된 삶이 아닌 일제와 맞선 의친왕 재평가에 대해 별로 들뜨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말한다. “아버지를 이해 못했다. 뵙기도 어려웠고, 세살 때 생모와 헤어져 지밀 어머니가 나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다른 궁에서 사시다가 새해나 제례 때면 사동궁에 들어왔다. 또 몸이 아프시면 궁에 들어와 어의를 만났다.”
▲궁에서 자라다
이해경씨는 1930년 성북동 별장에서 의친왕 이강의 13남 9녀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여러 후궁들처럼 사동궁 별채에 살던 생모는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가 저지른 잘못으로 궁에서 내쫓겼다. 지밀어머니는 소생이 없어 나를 딸처럼 키워주셨다.”지밀(至密, 왕과 왕비 처소)어머니는 조선왕조 마지막 왕비 의친왕비(연안 김씨)를 말한다. 이해경씨는 황실명 이공으로 의친왕과 의친왕비 장녀로 호적에 등재돼 있는 ‘진짜 공주’다.
“아버지가 후궁과 아이들을 데리고 사동궁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아버지 상차림과 후궁과 아이들 상차림을 똑같이 준비하였다. 어머니는 목석이냐고 하면 그래야 아버지가 마음 편하게 식사 하신다, 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않았다, 법도하고 결혼했다고 말하셨다”이해경씨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키워준 의친왕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있다.
경성여자사범 부속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궁에서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점심은 궁에서 따스한 밥을 지어와 혼자 숙직실에서 먹었다. 그것이 너무 싫고 친구들과 함부로 사귈 수도 없는 처지를 부담스러워하는 어린 해경을 본 어머니는 학교에 ‘해경이를 특별대우 하지말라’ 고 당부했다.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풍문여고 교사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가 혼수감으로 사둔 비단들을 배낭에 매고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팔아 늙은 의친왕과 의친왕비를 부양했다.
피난지에서 좁은 방 하나에 온가족이 살아 잠잘 곳이 없어 하던 중, 생모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잠시 함께 살았다. 신여성인 생모 김금덕은 재혼하여 동생들을 두었고 활발한 사회적 활동으로 여러모로 업적을 남긴 여장부였다.
“가족과 과거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미군사령부 도서관과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된 미군과 교회의 도움으로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 여대 전액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떠났다.” 한동안 가족들에게 주소도 알리지 않고 이해경씨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고 미국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썼다. “조선왕조는 오래전에 끝났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해경씨한테 황손으로서 갖는 미련과 우울함, 실의, 그런 단어를 찾기 힘들다.
홀홀단신 미국에 와서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새생활을 개척했지만 그 긴 긴 세월 혼자 지내면서 태어나고 자란 궁에서의 기억이 나고 외로울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어린 시절 유성기판에 맞추어 불렀던 노래를 하며 쓸쓸함을 달래지 않았을까.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어린 해경공주가 예법과 법도의 어려움을 피해 구중궁궐 깊은 방에 혼자 숨어 울면서 부르던 노래 말이다.
▲도서관에서 아버지를 이해하다
59년 졸업 후 공부를 더 하려고 뉴욕으로 왔다. 여름방학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김치 장사도 했다. 양배추에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김치를 일본가게와 중국가게에 가져다주었다.“맨하탄 뮤직스쿨, 헌터 컬리지에서 입학허가가 나왔다. 맨하탄 뮤직스쿨을 가고 싶었는데 등록금 350달러가 없었다. ”
그래서 간 곳이 학생비자를 발행하는 오페라 워크샵, 그곳에서 꾸준히 소프라노 개인레슨을 받았다. 46가 백화점에서 매니저 비서를 거쳐 데이케어 센터에서 일하던 중 ‘미국대학 졸업자는 영주권을 준다’는 존슨대통령이 정한 한시적 법에 의해 영주권을 받았다.
신분은 해결되었지만 일과 성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73년 카네기홀 독창회에서 ‘이제 마지막이다’는 심정으로 노래했다. 이해경씨와 구황실과의 화해는 1969년 컬럼비아 대학 동양학 도서관 사서로 들어가면서였다.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항일투쟁 기록을 찾아내고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했다. 무위도식하던 아버지가 아닌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지원 기록들을 찾았다. 죄송했고 그리웠고 보고싶었다.” 이해경씨는 1996년 의친왕이 유학했던 버지니아 로아노크 대학교를 찾아가서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사진과 기록을 찾아냈다.
1975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년만에 한국에 갔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서삼릉에는 표식도 없고 석등도 깨져있었다. 의친왕비가 있는 금곡릉으로 묘소 이전을 결심하고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한테 호소했다. 의친왕 묘소 이전 국비보조를 신청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해경씨는 월급에서 돈을 모았다. 그후 20년만인 1996년, 의친왕비 친정이 반을 부담하고 어려울 때마다 위로와 도움을 주는 학교 선후배들, 주위의 도움으로 금곡릉에 의친왕과 의친왕비 합장을 했다.이는 일제가 왕족들에게 호적을 해주지 않아 의친왕의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종친들 호적에 양자, 양녀로 들어가야 했고 갑자기 세상에 내팽겨쳐진 왕손들은 자리를 못잡았던 것이다. 그나마 장래가 촉망되던 오빠들은 전쟁으로, 사고사로 일찍 죽어 해경씨가 부모님 묘소 이장에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요즘 하는 일
컬럼비아 대학 도서관에서 27년간 근무하며 한국학과장을 역임한 이해경씨는 96년 은퇴, 한인사회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매주 화요일 버스를 타고 뉴저지로 가서 FGS 한인노인들에게 합창 지도를 한지 10년째다. 그리고 독도 알리기, 컬럼비아대학 한국학생회 주최 강연 등 한국 관련행사에도 종종 모습을
보인다. 가끔 한국에도 나간다. 97년 종묘에서 저서 ‘나의 아버지 의친왕’(현재 절판) 출판기념회, ‘조선말기 궁중생활사·복식문화’ 초청 강연 등으로 궁중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전통, 역사, 품위는 돈과 권력, 재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 올곧은 성격과 예법이 은연중 보이는 이해경씨.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를 찾아가서 파혼한 것은 잘한 선택이다. 결혼을 못한 것은 변하는 세태에 따라가기 바빠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수십년간 우정으로 맺어진 남자친구가 두엇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망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복희언니를 비롯한 선후배, 김자경 선생 모두 우리집에 잘 왔다. 한인여류 성악가의 집이라고들 한다.” 밝게, 명랑하게 말하는 이해경씨, 나이어린 기자한테 끝까지 겸손하게, 정성껏 답해
주었다. <민병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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