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 법 개정...거대한 사회실험
국가당 쿼터제 없애 아시아계.히스패닉계 대규모 유입
한국계 연 1백명서 연 2만명씩 가능...본격이민 시작
70년대 들어 ‘제3의 이민물결’...대규모 이민사회 형성
법안 제안자 필립 하트 상원의원
공동제안자 임마누엘 셀러 하원의원
1965년 10월4일 오후 뉴욕항 남쪽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리버티 아일랜드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개정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됐다. 하트-셀러법으로 불리어진 이 이민법 개정안이 상하 양원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대통령의 서명절차를 밟게된 것이었다. 서명에 앞서 존슨대통령은 이 법안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 법안은 혁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국민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 일생생활의 구조를 개조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들의 파워나 부에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부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의회와 행정부에 가장 중요한 이 법안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구조적인 결점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견뎌온 이 나라의 잘못된 행위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법안의 공동 제안자인 필립 하트 상원의원과 이마누엘 셀러 하원의원을 비롯하여 법안 통과의 막후실세로 힘을 발휘했던 로버트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형제가 참석했다. 두 형제는 2년 전 암살된 그들의 형 고 케네디 대통령 시절 발의됐던 이 개정안이 통과를 보게된 데 의미를 부여해 특별히 참석한 것이었다.
1965년 개정 이민법의 공식 명칭은 이민 및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으로 되어있다. 그때까지 유럽계에 편중돼 왔던 이민의 물줄기를 바꾸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존슨대통령이 연설에서 혁명적인 법안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비유럽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연코 혁신적인 법안이며 미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거대한 사회실험이었
다. 그때까지 국가별 쿼터제로 실시돼 오던 이민제도를 폐지하고 미국 이외의 지역을 둘로 나누어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이 포함되는 동반구에서 연 17만명, 유럽이 포함되는 서반구에서 연 12만 명의 이민을 수용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국가당 연 2만명을 넘지 않도록 제한했다. 그때까지 해당국가 이민자 인구의 2%내에서 쿼터를 주었기 때문에 연 1백명 정도의 쿼터를 배정받았던 한국은 이제 연 2만 명씩 이민이 가능케 되어 본격적인 이민의 활로가 트인 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권자의 21세 미만 미혼자녀와 배우자, 부모 등은 이러한 숫자 제한에 관계없이 이민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정 이민법은 한마디로 동양계에 대한 차별이민이 없어지게 된 한편 떨어져 살던 가족의 재회와 미국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는 내용을 기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1967년 7월1일부터 실시에 들어간 이 이민법 개정으로 인해 미국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
다. 이로 인해 미국 내 인구 구조상의 변화, 그리고 경제 및 문화면에서의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의 대규모 유입이었다. 1971년부터 2002년까지 통계에 의하면 이시기에 이민 온 아시아계 중에서 특히 필리핀계가 150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계, 인도계, 월남계가 각각 1백만명 이상, 한국계는 84만 여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입된 이민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간 불법체류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내 소수민족 중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흑인계를 제치고 히스패닉계가 부상한 이면에는 1965년 개정 이민법으로 인해 생겨난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법 개정 하나로 그와 같은 커다란 사회변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시사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 부터 가속이 붙기 시작한 한인들의 미주이민은 70년대 들어 피크를 이루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대규모 이민사회가 미국내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에 있어서 이제까지 역사상 그와 같이 많은 숫자의 공식적인 이민이 미국에 들어온 예는 없었다. 이를 흔히들 70년대에 밀려온 ‘제3의 이민물결’이라고 부른다. 그 이전에 있었던 이민이라고 한다면 1903년 공식으로 하와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해 을사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까지 총6,747명이 입국했던 사탕수수밭 노동이민. 이것이 한인들로서는 최초의 이민물결이었던 셈이다. 이후로 합법적인 이민의 루트로 들어온 제2의 이민물결은 사진신부를 꼽는다. 1910년대 부터 시작된 사진신부 이민은 미국에 이민온 동양인들이 시작한 결혼법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본토와 하와이에 있는 남자가 본국에 있는 처녀들에게 사진을 보내어 선을 보인 후에 그 사진을 보고 결혼을 허락하는 처녀를 초청해 오던 일시적인 결혼 이민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의 인종차별 관념으로 백인이나 현지인들이 황색인종과 어울리기를 꺼려해서 생긴 별난 이민 유형이었다. 1924년까지 지속된 14년간의 사진신부 이민으로 총 1,066명의 한인 처녀들이 미국에 합법적으로 입국한 잔잔한 이민물결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리고
본다면 미국본토를 향한 대규모 본격적인 이민은 70년대에 이루어진 제3의 물결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오늘날 2백50만에 육박하는 미주 한인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65 개정 이민법에 서명하는 존슨 대통령. 뒤에 로버트 케네디, 에드워드케네디 형제가 배석했다.
1964년 민권법 통과로 인종차별 법으로 금지
소수계 사회적 지위향상 가져와
민권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사회가 크게 차별받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또 다른 법이 있다면 그것은 민권법 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민권운동은 60년대 초 흑인들이 앞장서게 되었고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마틴 루터 킹목사였다. 한편 뉴 프론티어로 대표되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과 위대한 사회로 대표되는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의 주요 정책들이 민권향상과 사회복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자극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60년 2월 노스 케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에서 백인 학생만 출입이 허용된 식당에 흑인 학생들이 출입을 거절당하자 농성을 시작한 것이 승리를 거둬 전국적인 농성파업으로 확대된 나머지 1백여개 시에 흑인 차별대우 폐지를 가져온 일이 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앨라바마주 버밍햄시의 인종차별법을 반대하는 저항행진을 주도했다.
이듬해 8월28일에는 민권운동 지지자 약 20만명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들어 ‘자유와 직업을 얻기 위한 워싱턴으로의 행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이 행진에서 킹 목사는 그 유명한 ‘I have a dream’ 이라는 명연설을 했다. 그해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후임 린든 존슨대통령이 고인의 뜻을 받들어 민권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찬성과 반대끝에 1964년 통과된 이 법에 의해 공공시설과 장소에서의 흑백 차별, 고용에서의 흑백차별, 선거에서의 흑백차별이 법으로 금지됐다. 민권법의 실시에 따라 미국사회에서 인종적 장벽이 점차로 무너지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수민족의 사회적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되는 역사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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