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재 최초 미국 나들이
1957년 워싱턴 시작으로 뉴욕.LA등 9개 도시 순회
양국 대통령 며예위원장 맡아 합동후원회 결성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일단 멎은후 1950년대 후반 한미간에 이루어진 문화교류 가운데 가장 의미가 있었던 행사는 한국 국보의 미국순회 전시였다. 57년 12월 워싱턴을 시작으로 뉴욕, 보스턴, 미니애폴리스, 캔저스 시티,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등 9개 도시를 돌며 미국인들에게 선보인 한국의 문화유산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진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최초로 미국에 한국 문화재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국동란중 인류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 싸워준 미국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게 위해’ 마련된 미국순회 전시회에는 금관 3점, 금속공예품 24점, 조각 24점, 기와 7점, 회화 35점, 도자기 108점등 모두 198점의 각종 국보가 망라되었다.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덕수궁미술관, 서울 기독박물관 점시품 외에 손재형, 전형필등 개인 소장품도 상당수 이 전시회에 포함됐다.
한국 국보의 미국 순회전시회는 56년 말부터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국무성과 구체적인 절충이 시작됐다. 한국측에서는 한표욱 주미공사가 전담했고 미국측은 당시 미국무성 문화재 담당관 아델리아 홀이었다. 그녀는 2차대전때 미군들이 독일로 부터 입수해온 문화재중 상당수를 찾아 되돌려 보내는등 문화적 식견이 탁월하고 양심적인 공무원이었다. 독일뿐 아니라 한국에서 미군정때 이왕실로 부터 미군이 가져간 호피 140장으로 만든 카페트를 찾아 주미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되돌려 보낸 적도 있었다. 국무성의 호의로 미국순회 전시회를 갖는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이 났다.
순회전시를 위한 한미합동 후원회가 결성됐다. 후원회 진영을 보면 이 전시회가 얼마나 큰 규모로 이루어졌는가를 가늠해 볼수 있다. 명예 후원회장(Honorary Patrons)은 미국측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 한국측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맡았고 명예위원(Honorary Officer)은 양유찬 주미대사와 월터 다울링 주한미국대사가 맡아 가히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졌
음을 알수 있다. 또한 후원회 멤버(Patrons)로는 이기붕 국회의장, 최규남 문교장관, 조정환 외무장관, 김현철 재무장관, 오재경 공보처장(한국측),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윌버 브루커 육군장관, 토머스 게이츠 2세 해군장관,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미국측)등이 리스트에 올랐다. 미국측 박물관장 위원회에는 잔 월터 미국립 미술관장을 비롯한 8개 박물관장
등이 맡았고 한국측에서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 김법린 전 문교장관, 이선근 전 문교장관, 한표욱 주미공사, 백낙준 전 문교장관, 이병도 서울대학원장등이 각각 맡았다. 전시품은 모두 미해군의 협조로 군함을 통해 운송됐다. 미국에 도착해서 육로운송은 미육군이 담당했다. 그때문에 국보의 호송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1957년 12월15일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거행된 전시회 개막식에는 워런 대법원장이 참석했고 워싱턴 포스트, 타임등이 이를 크게 보도해 가는곳 마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뉴욕전시회는 해를 넘긴 1958년 2월14일 개막됐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개막식에는 특별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참석하여 명예 후원회장의 임무를 다했다. 이날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남궁염 총영사 부부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 도자기를 선물했다. 전시회는 한국으로 부터 김재원, 최순우, 김원룡, 진홍섭 전문가들이 국보와 함께 참가해 직접 관장했다. 이때 가는곳 마다 미국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를 감정해 달라고 찾아왔다고 한다. 김원룡은 훗날 그렇게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미국에 반출된 줄은 몰랐다며 아쉬워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뉴욕전시회 개막식때 아이젠하원 대통령이 참석. 남궁염 뉴욕총영사 부부가 한국 도자기를 선물했다.
한국전쟁중 국보의 운명은?
북한에 뺏기지 않기위해 쌌다 풀었다...
미국으로 옮겨 보관하려 했으나 불발
김재원
최순우
전쟁의 북새통에 문화재를 보존하고 미국에 옮겨와 전시회를 갖게 되기 까지에는 숱한 사연이 깃들여 있었다. 그 사연 중에는 전쟁중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킨 공무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이들 국보는 6.25동란 발발 당시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당시 국립박물관장 이었으며 미국 순회전시회의 산파역을 맡았던 김재원 박사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한 내용을 요약(한표욱저 한미외교 요람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6.25가 터진지 사흘후 서울이 점령되자 북한 문화재 요원이 경복궁을 접수하려 왔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국보를 싸라고 명령했다. 당시 박물관 직원은 최순우, 김원룡, 진홍섭등이었는데 그들은 즉각 북한 요원들이 국보를 북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뜻을 알아 차릴수 있었다. 직원들은 국보를 쌌다가 다시 풀고 또 싸고 … 그런 식으로 시간을 최대한 끌었다. 그 작업을 9월까지 했다. 물건을 다 쌌더니 경복궁 지하실 창고로 옮기라고 했다. 북한 요원들과 함께 운반차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9월 중순 갑자기 요란한 텡크 소리가 났다. 아마도 인천 상륙작전 직후였던것 같았다. 그러자 북한 요원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럭저럭 서울이 수복되었으나 또 언제 보물을 북에 빼앗길지 알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백낙준 문교장관에게 알렸더니 백장관이 이대통령에게 허락을 얻어 국보를 부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전쟁 중이라 운반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무초 대사 몰래 미대사관 문정관 크네스 박사와 담판, 겨우 화차를 구했다. 그해 12월 박물관 직원들을 가족과 함께 국보를 화차에 싣고 나흘만에 부산으로 옮겼다. 문정관 크네스는 미군정때 한국에 온 사람으로 한국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시라큐스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도 한국 김해 지방의 취락구조에 관한 연구였
다. 그는 이상백등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상백이 부산에서 당시 영화배우 최지애를 소개시켜 주어 두사람은 연애 끝에 결혼, 미국에서 금슬좋게 살고있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한국관은 순전히 크네스박사의 작품이다. 보물을 부산으로 옮겨온 뒤에도 정부는 불안해 한 나머지 그것을 미국으로 다시 옮겨 보관하려 했었다. 백문교가 몇번이나 미국의 의사를 타진했으나 미국측은 난색을 표시했다.
미국은 2차대전 직후 베를린 점령후 독일의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으로 잠시 옮겼다가 나중에 미국이 독일의 보물을 훔쳐갔다는 비난을 맏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측은 일본으로 피란시키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보였으나 이대통령이 완강히 반대했다. 이대통령은 일본이라면 강한 앨러지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더이상 운도 떼지 못했다. 후에 그 절충안으로 호놀룰루 박물관에 맡기기로 일단 결정이 났으나 한반도 전세가 호전되는 바람에 돼 끝내 옮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국 순회전시가 결정됐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한국 국보전시회를 소개한 뉴욕타임즈 기사 (1958년 2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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