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뉴욕정착과 함께 화법에도 큰 변화
뉴욕시대에 독창적으로 나타난 그의 점화 작품
라커펠러 재단의 아시아 하우스 14개월 보조, 뉴욕정착 계기
’점화’ 라는 독창적 기법으로 왕성한 활동
1963년은 화가 김환기에 있어 계획에 없던 ‘뉴욕 정착의 해로 기록된다. 그리고 이듬해는 그의 성공적인 데뷔 개인전의 기회(64년 10월 아시아 하우스)가 된다. 1960년대 뉴욕은 미국적인 팝 아트가 유행하던 때였지만 그 틈을 비집고 순수미술의 김환기가 자리를 잡은 시기다. 미국의 광대한 자연에 매혹된 그는 뉴욕에 정착하면서 화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점화라를 독창적인 기법으로 주로 대작을 그렸다. 작품 스케일을 점점 키운 나머지 대작 위주로 가고 있었다.
지난 84년 김환기 10주기전을 개최했던 국립현대미술관 김세중 관장은 뉴욕 체재시 김환기의 작품들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조형적 모티브를 탈피하여 평면적인 단일 패턴에 의한 일련의 규칙적 반복을 통한 고르고 담백한 색조로서 하나의 통일된 공간을 조형화하고 있으며 뉴욕이라는 비정한 메커니즘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침잠시켜 현대의 공허와 생명감을 고도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뉴욕 아틀리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 손수 목재를 사서 문짝을 짜듯이 속틀을 만들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 물론 비용도 많이 들지만 그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손수 그 작업을 한 것이다. 속틀을 너무 무겁게 짜면 목면(캔버스)이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이를 가볍게 만드느라 목수일 까지 스스로 했다. 속틀을 메운 다음 아교를 칠하고 작가가 만든 빛깔들로 점을 찍고, 점들을 네모꼴로 한번, 두 번, 세 번 둘러싸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른바 그의 독창적인 점화가 제작된 것이다. 이 점화가 등장한 것은 60년대 후반이었고 본격적인 면모가 드러난 것은 7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 그는 그런 대작들을 1년에 평균 10폭 정도 그렸다.
한때 파리생활에 젖어있던 김환기는 브라질에서 열린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1963년 9월)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하고 귀국길에 뉴욕에 들렀다가 존 D 라커펠러 3세 재단이 아시아 문화 발전을 위해 설립한 아시아 하우스의 14개월 보조를 받게 된 것이 뉴욕에 발을 깊숙히 담그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서도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뉴욕이었던지라 보조비를 받는 14개월동안만 체재할 심산으로 일단 자리를 잡았다. 컬럼비아대학 근처의 조그마한 아파트 방을 얻어 거처하면서 부산 피난시절 미국공보원에 근무하면서 그림을 사랑했던 미국인 친구 빈센트 브루노의 90가 아틀리에를 사용해 작품활동을 했다. 브루노는 당시 컬럼비아대학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혼자 몸으로 타지에 떨어진 환경이 그로 하여금 전심을 기울여 예술세계에 탐닉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는지 모른다. 작업에 지칠 때면 걸어서 산책길이 되는 허드슨 강변에 나가 앉아 작품구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미국에 익숙해져 자신을 얻은 그는 66년 4월 타스카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1963년에서 1974년에 이르는 그의 뉴욕시대에 제작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 김환기 회고전이 지난 87년 파리 국립조형미술센터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를 보고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공간’지 미술시평에 기고한 김환기의 뉴욕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뉴욕에 정착하면서 부터 엄청난 변혁을 시도했음은 작가의 일련의 캔버스 화폭을 보면 당당 발견할 수 있다.
서울시대 까지 지속되었던 두꺼운 마티엘 화면이 사라진 대신 화폭에 엷게 물감이 번지면서 스며들게 하는 수법이 등장하면서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지워져 갔음이다. 어떤 대상을 연상케 하는 형상이 아니라 순수한 추상적인 도형으로서 선이나 원이나 사각 같은 요소들이 화면을 채우면서 순수색면 추상을 드러내 주었다. 이 무렵 같은 재단의 보조를 얻어 미술비평을 공부하러 뒤따라 온 부인 김향안(시인)이 합류, 맨하탄 160W. 73가(컬럼버스 애비뉴와 앰스털담 애비뉴 사이)의 셔먼 스퀘어 스투디오 빌딩에 8백스퀘어피트 짜리 널찍한 아파트를 얻어 새로운 뉴욕살림을 차렸다. 라커펠러 재단의 보조가 끊긴 이후로는 평균 2년마다 열리는 전시회 수익금을 갖고 부부는 넉넉지 못한 생활을 했다.
생계를 돕기 위해 부인이 삭스 5애비뉴 백화점에 나가 일을 했고 옛날의 그림 복사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66년에는 화랑주인이 도망가는 바람에 전시된 그림 전부를 잃는 손해도 보았다. 그가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붓던 70년부터 건강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작을 만드느라 무리를 거듭하다 보니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고 목뒤에 디스크가 생겨 수술도 했다. 남들은 60이 넘으면 작품 크기를 줄이는 판에 그는 거꾸로 대작을 고집했고 하루 10여 시간씩 캔버스에 매달리다 보니 운동부족이 되었던 것. 74년 초 포트체스터의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디스크 수술을 받고 회복단계에 침대에서 떨어져 뇌일혈을 일으킨 것이 원인으로 7월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바랄라 공동묘지에 조용히 묻혔다.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 출생인 그는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나와 해방후 국립서울대 및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다가 1956년부터 59년까지 3년간 파리생활을 했다. 동양의 정신과 전통 속에 자리잡은 조형의식을 서양식 표현매체로써 나타냄으로써 독자적인 예술의 세계를 구축했던 그는 6척이 넘는 훤칠한 키에 목이 보통사람보다 길어 기린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파이프 애호가였다.
부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시인 김향안
78년 환기재단 설립, 남편 유지 받들어
한편 경기고녀와 이대 영문과를 나온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재능과 미모의 인텔리 여성으로 18세때 천재작가 이상을 만나 동거하다가 그가 27세에 뇌출혈로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던 여인. 1944년 김환기와 재혼, 55년부터 파리에 머물다 64년 뉴욕으로 합류해 정착했다. 74년 김화백올 보내고 뉴욕의 아파트에서 홀로 남편의 유작을 돌보며 78년 환기재단을 설립, 고인의 유지를 살려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문화사업도 벌였다. 이후로 뉴욕과 파리, 서울 부암동의 환기재단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 지난 2004년 7월29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사망한지 꼭 30년 만에 남편 곁에 묻혔다. 저서로 파리, 카페와 참종이, 마로니에의 노래 등 수필집이 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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