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특명으로 초대 총영사에 남궁염 임명
1949년 맨하탄 9E.80가에 공관마련, 12년간 재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뉴욕에 제일 먼저 생긴 공관은 뉴욕총영사관. 1949년 4월1일을 기해 총영사관이 업무를 시작했으니까 금년으로 60주년을 맞은 셈이다. 워싱턴에 주미대사관이 설치되던 시기와 거의 비슷했다. 초대 총영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남궁염이 임명됐다. 남궁염은 때마침 뉴욕에 와있던 이순용(전 내무장관)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하나 얻어 준비를 하다가 본국정부와 상의 끝에 쓸만한 건물을 하나 물색하게 됐다. 맨하탄 9 E. 80가로 센트럴 파크가 반블럭 떨어져 있고 비교적 위치가 좋아 공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4층 건물로 당시 시세로 4만불 정도의 싼값에 매입했다.
지하실은 식당, 1, 2층은 사무실, 3, 4층은 사저로 개수를 마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개관식날 뉴욕 하늘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나부끼는 모습에 참석한 교민들은 감격의 눈시울을 적셨다. 공관은 마련했으나 경비를 최소한 줄이라는 외무부 훈령에 따라 사무기구도 사지 못했다. 남궁염이 집에서 쓰던 가구들을 임시로 사용했고 청소비도 아끼느라 밤을 기다려 남이 안볼때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청소를 했다. 이 건물은 뉴욕총영사관 재산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 뉴욕총영사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이무렵 본국에서 신생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유학생들이 한두명씩 입국하기 시작했다. 당시 뉴욕총영사관은 미국내 제일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유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부를 중심으로 한 각대학과 연결을 갖는게 중요 임무중의 하나였다. 한편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의 숫자도 점차 늘기 시작해 비자업무를 취급하는 미국인 서기 1명과 한국인 서기 1명을 현지에서 고용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재승이란 사람이 오랫동안 일했다. 이어 정부관리, 사회 정치단체 임원, 각종 사절단, 군지휘관등이 자주 뉴욕을 방문했다. 한국동란 중에는 총영사가 전사 미군들의 가족을 찾아가 위로하는 일도 잦았고 구호물자 수송에도 많은 시간 할애했다. 전쟁으로 인해 미국내에 코리아가 많이 알려질 때였으므로 여러군데 초청을 받아 연설하기도 했다. 총영사관의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부영사로 최용진(최호진 교수의 형)이 부임했고 고용원도 늘어났다. 영사관 수입도 함께 늘어나 자체경비를 충당하고 남을 적에는 가난한 본국정부에 부친 일도 있었다. 남궁총영사는 뉴욕근무 12년동안 자가용 승용차가 없었다. 본국정부의 지시대로 근검절약을 실천했고 직원들에게도 영수증 없이는 한푼의 경비지출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유학생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한국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유학생 정책이 학업을 마치는대로 귀국하여 조국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엄명이었으므로 공부를 마치고 우물쭈물하는 학생들에게 가차없는 귀국령이 떨어졌다. 매년 여권 연장때가 되면 학생들이 애를 먹었다. 한학기만 휴학해도 독촉과 압력을 받았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학비가 떨어져 휴학을 하는 경우도 생기고 전학하느라 한학기 정도 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예외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학생들은 총영사관을 지나친 관료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대통령의 그와같은 유학생 정책은 그가 물러날때 까지 일관된 것이었으므로 총영사관이 유학생들로 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 응어리가 1960년 4.19와 함께 터져 일부 유학생들은 공관에 몰려가 데모를 벌인 일도 있었다.
남궁염 총영사는 4.19와 함께 현지에서 사직했다. 이에앞서 1959년 3월 본부와의 연락관계로 일시 귀국했을때 이대통령에게 건강을 이유로 사직할 뜻을 밝했던것. 그러나 이대통령은 어려운 때이니만치 얼마동안 기다리라고 해서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총영사직을 계속 맡고 있었다고 부인은 말했다. 4.19직후 허정 과도정부 수반이 남궁총영사의 사정을 전해 듣고 하와이 총영사로 전임하면 뉴욕과 같이 일도 힘들지 않고 건강도 회복될수 있을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그길로 총영사관을 나가고 말았다고 한다. 12년동안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던 그로서 휴양을 위해 롱아일랜드에 조그만 집을 사서 나간후 총영사직은 약2개월간 공석으로 있었다. 제2대 문덕주 총영사가 7월에야 후임으로 부임했다.
구 뉴욕총영사관 건물
남궁염은 누구?
박영효 도움으로 1907년 유학길
이승만 중매로 유학생 우복자와 결혼
뉴욕으로 이주 이승만 대리인 역할
관직을 떠난 버린 남궁염은 그후 약 1년간 롱아일랜드에서 정양했으나 워낙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61년 11월29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74년에야 환국할수 있었다. 강원도 홍천 선영에 뒤늦게 묻혔다. 뉴욕총영사관 창설로 부터 1960년 4.19가 날때까지 12년간 최장수 총영사를 지낸 남궁염은 약간 긴 얼굴에 콧수염을 길러 위엄을 풍기는 인상이었다. 해방전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 또는 초창기 뉴욕지역 유학생들이나 기억하는 인물이다.
1907년 미국에 유학, 이승만의 측근으로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 미국에 정착했던 인물이어서 그에 대한 자료는 외무부에도 아주 빈약할 정도로 남아있었다. 붓글씨로 쓴 이력서 한통 뿐이었고 유가족들도 모두 미국에 살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필자는 여러해 동안 그의 유가족을 수소문한 끝에 84년 6월에서야 노스 캐롤라이나에 살고있는 미망인과 접촉이 이루어져 그에 대한 자료를 얻을수 있었다.
남궁염은 한말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 3대독자로서 1888년 3월17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깨우친후 박영효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에 길에 오른 것이 1907년 11월. 고학으로 버지니아주 랜돌프 매건 대학을 다니던중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하던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남궁염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우복자(미국명 조앤)를 이승만으로 부터 소개받아 1924년 8월20일 뉴욕한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처녀의 아버지 우흥태가 이승만과 YMCA때 부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중매를 했던것. 남궁염은 워싱턴에 살고 있었으나 뉴욕 이주를 염두에 두었던지 뉴욕한인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결혼식때 신부의 아버지는 이미 귀국한 때였으므로 이승만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했다.
1926년 뉴욕에 이승만계 동지회가 설립될 당시 남궁염은 이에 가담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말하자면 이승만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노동주선소(직업소개소)를 운영한 적도 있었다. 이승만은 뉴욕을 방문할때 거의 남궁염의 집에 묵었으며 그를 할아버지 처럼 따랐던 남궁염의 자녀들과 허드슨 강변에서 종종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남궁염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준은 84년 당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다. 딸 혜원은 당시 아시아 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 필리핀 마닐라에서 살고 있었고 막내아들 진은 미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있으면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로 재직했다.
남궁염 부부(사진 왼쪽에서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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