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엔은 뗄래야 뗄수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으로 적화될뻔 했던 한반도가 위기에서 구출되었고 그후로 부흥되는 과정에서도 많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유엔 한국통일 부흥위원회를 통해 민주정부 수립과 한국의 구조, 그리고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원조도 제공했다. 그렇게 맺어진 유엔과의 특별한 인연은 오늘날 까지 끈끈하게 맺어져 왔다. 지난 2006년에는 유엔의 수장인 사무총장에 한국인 반기문이 선출되는 믿기 어려운 경사까지 겹쳤다. 국력으로나 유엔내에서의 활동, 역사를 살펴볼때 한국으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유엔과의 인연은 사실상 한국정부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유엔 창설 초기인 미군정시대 부터 한국의 운명을 유엔에 맡기려는 은밀한 노력이 추진되고
있었다.
■두 임씨, 레이크 석세스 유엔본부서 활약
46년 군정 당시 한국에는 과도 입법의원이 있었다. 의장이 된 이승만은 임영신을 유엔대표로 지명하면서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 임병직과 함께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끌어가도록 하는 공작을 진행시켰다. 임영신이 임병직과 함께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46년 1월26일이었다. 당시 유엔본부는 지금의 맨하탄 그자리가 아니고 롱아일랜드 레이크 석세스에 있었다. 레이크 섹세스는 퀸즈와 내쏘 카운티의 접경으로 그레이트넥 바로 남쪽에 있는 인구 3천명이 채 안되는 자그마한 타운이다. 1946년 부터 51년까지 6년간 임시 유엔본부가 이곳에 있었는데 퀀세트로 지어진 가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50여개국 대표가 모인 유엔이라지만 그때 코리아의 의석을 물론 없었다. 두 임씨는 유엔 사무국에 출입마저 할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호텔에 들어온 임영신은 이박사에게 신문기자증을 하나 보내달라고 전보를 쳤다. 며칠후 군용기 편으로 도착한 동아일보 미국 특파원증으로 프레스 카드를 얻어 비로소 유엔건물을 자유로이 들나들수 있게 되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루즈벨트 대통령 미망인이 하루는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을 자기집으로 초대해서 임영신을 소개해 주고 협조를 부탁했다. 루즈벨트 미망인의 힘을 실로 컸다.
리 총장은 다음날 본회의장 뒷편 업저버석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임영신이 갖고온 민주의원의 탄원서를 유엔의 공식문서로 채택하는데 큰 힘을 보태주었다. 당시 탄원서 내용은 1.모스크바 선언은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기 때문에 무효화 되어야 하며 2.미군과 소련군은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 3.한국정부가 수립되어 즉각 유엔에 가입되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임병직과 임영신은 활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가운데에도 각국 대표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국 대표 쿠 박사, 필리핀의 로물로 대표, 인도의 네루 대표등은 아주 협조적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은 미온적이었다. 멕시코, 파나마, 이디오피아, 과테말라 대표들은 도와주고 싶지만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지 않고 소련과 타협해서 처리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미국대표는 국무성과 의논해 보라는 태도로 나왔다. 이무렵 국내에서 군정의 하지장군과 불화를 가졌던 이박사가 돌연 미국에 나타났다. 그는 독립운동 시절부터 잘 아는 미국 정계의 유명인사들을 움직여 하지 장군을 소환하도록 하는 압력을 넣는 한편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한후 이들은 계속해서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독려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승만의 뜻대로 하지 장군 소환 공작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얼마후 이들의 공작은 모두 성공해 하지도 소환되고 한국문제도 유엔총회에 정식 의제로 상정되어 남한 단독정부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임병직(오른쪽)과 윤치영
■대통령 특사로 세계순방한 조병옥
한편 초대내각의 외무장관 설이 있던 조병옥은 의외로 대통령 특사에 임명되어 세계각국 방문길에 올랐다. 김우평, 정일형이 수행원이 되고 김준구가 수행비서로 구성된 특별사절단은 정부수립 직후인 9월6일 일본으로 향발, 맥아더 장군을 만나후 중국 남경으로 날아가 장개석을 만나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을 공식 전달하고 국제협력을 구했다. 필리핀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일행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대한민국의 주권을 찾게된데 대해 특별한 사의를 표한뒤 캐나다를 거쳐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경을 만나고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에서 장면, 장기영, 김규홍. 김활란등과 합류한 일행은 현지에서 유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고 조병옥은 최고 정치고문이 되었다. 늦가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승인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1948년 12월12일 48대6으로 승인이 가결되었다. 파리에서 임무를 완수한 일행은 뉴욕으로 와서 그해 연말 귀국때까지 머물렀다.
23년만에 뉴욕땅을 다시 밟은 조병옥은 감개무량했다. 1918년 컬럼비아대에 입학해 12년간 뉴욕생활을 했던 그로서 힘겹던 고학생활이 생각났음인지 호텔 종업원들에게 팁을 득뿍듬뿍 집어주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뉴욕 체재중 그는 술집에서 스캔들을 만들었고 술값을 정부경비로 유용했다 해서 비난을 받았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후로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잠석하기 위해 여러차례 뉴욕을 방문했다.
▲1948년 12월 뉴욕시내 한 식당에서 찍은 유엔대표 일행의 사진. 왼쪽부터 조병옥 대표, 김활란을 수행했던 이정애, 거부 이원순, 김활란, 성악가 마금희, 김자경, 이원순의 부인 이매리(3공때 국회의원)
■유엔 덕 가장 많이 본 한국
유엔은 1948년 소련등 6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총회를 열어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미국 주도로 신속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이때 이사국이었던 소련 대표는 자유중국의 대표권에 항의하여 불참했기 때문에 비토권을 행사하지 못해 파병안이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수주일후 소련이 복귀하여 기부권을 행사함으로서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수 없었고 이때부터 미국 주도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한국은 1951년11월 유엔 뉴욕본부에 상주대표를 설치하고 대사를 파견했다. 북한은 1949년 부터 유엔 가입을 신청했으나 거부됐고 1973년 옵저버 사무소를 설치, 제28차 총회 부터 한국과 함께 업저버로 참가했다. 1985년 총회에서 최초로 한국의 노신영 국무총리와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이 함께 연설하는 진전을 이루었다. 한국과 북한의 유엔가입 문제는 냉전과 남북한의 대결,
안전보장이사회의 잇단 거부권 행사로 여러차례 좌절되다가 1991년 9월17일 ROK(대한민국)와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로 동시에 가입됐다.
1996년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 한국인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보고서는 일본정부에 대해, 구일본군의 위안소 제도는 국제법에 위배되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자료의 완전공개, 가해자의 공식사과, 교육을 통한 문제의 인식, 책임자의 처벌을 골자로 했다. 또한 1997년말 한국이 경제위기를 맞았을때 유엔 관련 정부간 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으로 150-200억 달러의 지원을 받아 경제소생에 큰 힘이 되었다. 이후로 한국은 유엔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9년1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에 상록수 부대를 파견한 이후로 여러차례 유엔 국제평화유지군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다.
▲현위치에 건설중인 유엔본부 건물
조중무<언론인,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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