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여러 면에서 늘 중국인들과 비교되기 일쑤지만 미 정계진출에 있어서만큼은 중국인들이 한인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뉴욕한인사회는 정계진출 과업이라는 대 명제 앞에서 중국 커뮤니티를 뒤쫓아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과정을 살펴 그들의 실수를 우리의 교훈으로 삼는다면 뉴욕한인사회 숙원사업인 ‘한인 선출직 공무원 배출’ 염원을 이루는데 있어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터.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이 뉴욕한인사회에 현실로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을 짚어봤다.
■벼락치기는 NO! 준비는 밑바닥부터!
뉴욕의 지역선거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정치란 벼락치기 공부로는 결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는 시험과도 같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큼 기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참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뉴욕의 ‘첫 아시안 및 중국계 선출직 공무원’으로 중국인들의 자랑인 존 리우 현 뉴욕시의원(제20지구)도 시의원이 되기까지 준비해 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 이는 현재 뉴욕주의회 유일한 아시안 의원이자 역대 최연소 아시안 의원이란 타이틀을 지닌 그레이스 맹 주하원의원(제22지구)도 마찬가지.
학창시절부터 일찌감치 정치인 사무실과 선거캠페인 본부 등을 섭렵하며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지지기반을 갈고 닦아왔다. 특히 리우 시의원은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시작해 지역 정치인의 후원금 모금 행사에 이르기까지 기여도가 엄청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학부모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던 방식의 뉴욕시 교육위원 선거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셔야 했다.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의 김동찬 사무총장은 “가장 밑바닥부터 꾸준히 닦아 올라가면서 정계 인맥도 쌓아 확실한 지지기반을 구축하며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판단됐을 때 유권자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쳐야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한다며 표심에 호소하는 것은 무작정 떼만 쓰는 아이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당 공천은 기댈 언덕이다
선거는 정치인을 뽑는 일이기 때문에 소속당의 후원과 지지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소속당의 공천을 확보하는 일은 정치인생을 걷고자 하는 후보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의 하나다. 그렇다고 소신 없이 행동하며 무조건 당의 노예가 되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소속당을 기댈 언덕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신뢰를 얻고 지지기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리우 시의원은 한인사회에 모범 답안이라 할 수 있다. 수차례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소속인 민주당의 다른 정치인 후원행사에 발 벗고 나섰고 후원자 확보에도 적극적으로 뛰면서 훗날 자신의 선거를 밀어줄 지지 세력을 구축하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 자신의 지역구인 제20지구에 출마를 선언한 자신의 수석보좌관인 한인 존 최 후보를 공식 지지하고 퀸즈 민주당클럽 공천까지 받게 한 일이 놀랄 일이 아닌 이유는 바로 최 후보가 리우 시의원과 함께 시의원 생활 8년을 포함, 무려 12년간 동고동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도화선
중국인 커뮤니티가 정치인 배출을 위해 처음부터 열심이었던 것은 사실 아니다. 여기에 도화선이 된 것 역시도 존 리우 시의원이다. 그가 몇 차례 낙선을 거듭하면서 선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중국인 선출직 공무원 배출에 대한 염원이 뜨거워졌다. 존 리우 시의원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리우 시의원의 감사원장 선거캠페인본부에 있는 샤론 리 언론담당관은 “뉴욕 중국인 커뮤니티의 대대적인 유권자 운동에 불길을 당긴 인물이 존 리우 현 시의원이라는데 그 어떤 중국인들도 토를 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 시의원에 당선되기 훨씬 전인 1997년 선거에서 리우 당시 후보가 패배한 직후 실제로 중국인 커뮤니티에서는 유권자 운동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됐고 이후 매년 괄목할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당선을 목표로 선거에 뛰어든 출마 후보가 승리를 맛보려면 당연히 유권자들의 지지와 실질적인 투표가 필요하고 이에 앞서 유권자 등록은 필수 전제조건이라는 기본 공식을 보여준 것이다.
■후원금은 이렇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중국인이지만 정치 후원금만큼은 한인보다 ‘화끈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여러 정치인 후원행사에 참여한 경험이 많은 한 한인사회 관계자는 “뉴욕의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거물급 정치 후원자이자 ‘큰 손’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기업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반 평범한 후원자들도 선거규정이 정한 한도액을 꽉꽉 채워 기부하는 일이 흔하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이 오랜 미국의 이민 역사 속에서 받은 설움과 차별로 맺힌 한인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정치적인 힘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도 한 몫 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양껏, 제대로 기부금을 내는 중국인들과 달리 한인들은 대부분 인사치례용으로 여기저기 면피할 만큼의 후원금을 내는데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뉴욕 한인사회는 올 3월 치른 제31대 뉴욕한인회장 선거에서 ‘우리도 한다면 한다’는 가능성을 검증한 바 있다. 과거와 달리 유독 출마 후보들을 위한 한인사회 후원금 모금운동이 눈에 띈 것이 특징이었던 데다 한 행사에서 수만 달러를 거두는 일도 허다했다. 올해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3명의 한인 후보들이 현재 모금한 후원금이 당시 뉴욕한인회장 후보들이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모았던 후원금보다도 미비한 수준인 점을 살펴본다면 과연 첫 한인 선출직 공무원 배출 염원이 어느 정도 절실한지 의문을 갖게 한다.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각 차이
올해 플러싱 제20지구에 한인후보 3명이 출마하는 경쟁구도를 형성하면서 이미 한인후보 단일화 문제는 찬반논란이 들끓은지 오래다. 그렇다면 중국인 커뮤니티도 그럴까? 대답은 “예스(Yes)이면서도 노(No)라고 할 수 있다.단일민족임을 자랑하는 한국인과 달리 중국인 커뮤니티는 사실상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있다. 중국 본토 출신과 대만계의 대표적인 대립갈등 구도 이외에도 홍콩계 중국인이나 최근 유입이 크게 늘고 있는 월남계 중국인까지 그 뿌리가 제각각이다. 때문에 매번 선거 때마다 출마하는 중국계 후보들도 많고 그 지지기반도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 커뮤니티는 후보 단일화 문제로 한인사회처럼 그리 시끌벅적하지 않다. 1990년대에 두 차례나 뉴욕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던 폴린 추씨는 “한인 후보가 여럿 출마하면 한인 표를 갈라놓을 뿐이라는 유권자들의 지적도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차기, 또는 차차기를 노리는 전략적 차원에서 굳이 이들 한인 후보들의 출마를 막거나 사퇴를 종용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오히려 떨어질 각오로 출마해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지역사회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기회로 삼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존 리우 시의원이 2001년에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바로 낙선했을지언정 이전에 여러 차례 지역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이름을 알린 덕분이라고 추씨는 분석했다. 1997년 리우와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모두 낙선했다가 다시 2001년 선거에 또 한 차례 맞붙게 됐을 즈음 자신이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리우의 당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는 것.한인권익신장위원회 박윤용 회장은 “한인 유권자 수가 중국인보다 크게 적어 한인 표를 하나
로 모아야 한다는 논리적 차원에서는 수긍하지만 자칫 주류사회를 상대로 제대로 선거운동도 하기 전에 한인사회 내부에서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지지기반은 인종을 뛰어넘어
플러싱 다운타운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중국인들은 한인 마켓이며 식당 등 인근 한인업소를 자주 이용하는 반면, 중국인 업소를 이용하는 한인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한인들이 타인종과의 교류에 지나치게 어색하다는 지적이었다. 중국인들은 한인에 비해 비교적 타인종에 관대한 편이다. 이는 그간 중국계 후보들이 수없이 출마했던 맨하탄 차이나타운에서도 여태 중국인 시의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데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차이나타운이 포함된 제1지구에 출마한 한인 PJ 김(한국명 김진해) 후보를 지지하는 중국인 유권자들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미국의 휴대폰시장과 전자제품 시장 등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LG나 삼성 등 한국 상표
들도 한인들보다는 구입해 사용해보니 좋았다는 타인종의 평가하면서 상품가치를 올린 것과 같은 이치다. 폴린 추씨는 “후보의 인종적 배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를 위해 제대로 일할 사람인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추씨는 현재 제19지구에 출마한 한인 케빈 김 후보 캠페인을 지지하고 있다.
■한인사회가 살릴 장점은 많다
폴리 추씨는 “한인과 중국인은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졌지만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한인들이 중국인보다 훨씬 더 잘 화합하고 단결하는 것 같다. 이제 한인사회도 때가 무르익었고 좋은 장점을 최대한 살린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윤용 회장은 “중국인 커뮤니티와 경쟁하면서 뉴욕한인사회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이민역사를 비교하면 사실상 한인사회가 중국인들보다 훨씬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토양이 필요하듯 다소 늦었다고 생각되더라도 바늘허리가 아니라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마음으로 정도를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한국이 메달도 따지 못하는 올림픽에 수많은 대표선수를 출전시켜 경험을 쌓게 했던 것과 같은 이치로 능력 있는 한인 후보들이 많이 출마해 경험도 쌓으며 다진 기반이 뉴욕에서도 언젠가 한인 선출직 공무원이 1명이 아니라 다수가 나올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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