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7> 가주외환은행
1974년 LA에서 가주외환은행 강영남 이사 부부(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와 필자 부부가 자리를 함께 했다.
1970년대 타운, 일본·중국커뮤니티 비해 미미
자산규모 열세·선입견 극복 우수한 실적 올려
■ 인사
가주외환은행을 개점한지 1년이 좀 지나서 교포들의 집결지라 할 만한 올림픽가에 지점을 열었다.
1975년 중반으로 기억한다. 서울서 또 다른 행장의 취임 후 우리 은행에 과장급 두 사람을 전보 발령한다는 통보가 왔다. 그때 우리 은행은 매월 손익계산서를 상세히 들여다보고 분석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때이다.
과장급 두 사람은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 업무화에는 도움이 되겠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금전부담은 적지 않다. 매월 6,000~7,000달러의 경비가 추가되는 셈이다.
우리 은행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다. 나는 서울의 새 은행장께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 보내주는 것은 고맙지만 오히려 취소해 주시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이익을 내야 하는 절박한 마당에 두 사람의 원급을 감당해 낼 수가 없다. 인력이 더 있다면야 좋겠지만 당분간 각자가 더 힘내서 일해 보겠다.” 서울 행장은 “아, 이거 다 해놓은 건데” 하며 힘든 입장이다.
한참 말을 주고받다 결국 그 두 사람의 봉급은 LA지점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우리 은행의 일을 하는 것으로 했다. 서울 본부에서는 그 두 사람이 성적이 좋았기에 포상으로 우리 은행에 전보시켰던 것이다. CKB가 자신의 자은행인만큼 거기에 직원을 파견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 감독기관 검사
주 은행국과 FDIC에서는 개업 직전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번갈아 매년 한번씩 업무검사를 나왔다. 처음에는 자본금 자산 등 상태가 괜찮다 하더니 영업상태도 양호하다고 판정을 해주었다. 그러나 양호하다는 인정을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신설 은행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은행 거래처를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고 내린 결말이다.
감독기관의 감사 지시사항은 어떤 경우에도 자상하고 적절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지시사항을 하나하나 재검하고 필요한 수정을 해가다 보면 은행의 건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적절하고 중대한 기회를 제3자에게 맡긴다면 은행 직원들의 자질 향상은 어떻게 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느 은행 근무 시절에나 ‘감독기관의 검사 보고는 우리들의 바이블’이라고 굳게 믿었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었다. 영어로 말하면 ‘Good old days’라 할까. 감독기관의 검사방침, 요망사항 등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도 은행 내의 공기, 간부들의 경력인품을 살필 수 있었다고 본다.
그 외에는 나는 그런 검사팀과의 허물없는 회합이 은행 매니지먼트의 업무추진 의욕을 돕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어쩌면 의욕을 자아내기 힘든 은행업무, 그런 업무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은행원의 자긍심을 북돋워주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모임이 갖고 오는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적지 않았다. 이런 모임은 그러나 오래 허용되지 않았다.
한미은행이 개업한 이후 감독팀은 회식을 꺼리게 되었다. 어렵사리 식사를 같이 한다 해도 식대는 서로 각각 부담하는 식이 되었다. 손님에게서 향연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그런 원칙 때문에 은행 간부들은 개인적인 즐거움뿐 아니라 더 중요한 정보 수집 수단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런 회합이 일조를 했는지 모르겠다. 가주외환은행과 나는 감독기관의 신임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일 잘하는 은행으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일급 합격증을 받은 것이다.
■ 업무 성적
1974~1975년 당시는 Koreatown(당시는 이런 명칭도 없었고 그런 낱말을 쓸 만한 자신도 서지 않았다)의 인구를 3만으로 추정하면서 그것을 상상도 못할 천문학적인 숫자로 여겼다.
이희덕씨가 경영하고 있던 지금의 서독안경 건물(Olympic & Harvard) 자리의 ‘올림픽 마켓’에서 한국식품을 사면서 뭐랄까 일종의 공동의 긍지를 나눴다.
당시 우리 교포사회에 비해 일본과 중국 교포사회는 월등히 큰 규모였다. 일본 교민은 넓은 지역에 걸쳐 10만, 중국 교민은 50만이나 된다고 추정되던 시기다. 이에 비해 한국 교포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세였다.
일본에서 제일 큰 은행의 자은행이고 또 우리의 몇 배나 되는 사회 환경 등을 고려할 때 그 새 은행이 잘 운영되리라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다. 실제 그들의 초기 자본금도 우리의 두어 배는 되었다. 업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 은행도 실수 없이 잘 따라갔다.
나는 1979년 초여름 행장 자리를 떠났지만 1978년 말의 실적에 따르면 총 재산이 105만달러에 달했다. 이때 가주 제일권업은행은 한 3,000만달러 앞섰다. 그러나 성과 계산에서 연 순익 50만달러를 달성한 CKB의 업무 실적은 그들을 월등히 앞선 것이었다. 은행 평가기관들의 심사에도 최우수 은행을 지칭하는 ‘Premier Bank’의 영예를 받았다.
내 자신이 작은 새 은행의 경영에 골몰하고 있던 수년간은 되돌아볼 때 한국을 위한 특별한 시기였다.
먼저 본대로 이 기간에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억척스레 밀고 나가면서 그런대로 발전의 새싹이 움트고 있던 때였다.
그런 본국의 추세를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새 은행팀은 뜻밖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자신에 눈을 떴다 할까. 자신에 대한 신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밖에서부터의 자리매김에서 받은 자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가주은행이 개업할 때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은행을 경영할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의문을 던지는 외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의문을 반영하듯 우리 자신들도 충분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을 주장하는 용기를 좀처럼 갖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한국인들은 은행경영 능력이 없을 거야 하는 견해가 은연중에 성립되었던 것이다. 저거 봐 저거 봐 하고 누가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새벽안개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에 안개가 사라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심경의 변화, 그러나 그것은 실로 중대한 지각 변동임에 틀림없다. 우리 한국인은 미국 정부가 가장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는 은행업에서도 어쩌면 미국인들보다도 더 좋은 경영실적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에 뛰어들고 있던 한국인의 억척같은 돌파구를 구축한 예다. 돌파구 구축은 다른 경제부문-공업, 건축업, 무역 등-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이민사회에서는 가주외환은행이 그 고리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곧 전개될 팽창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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