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고요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히터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끝나는 것은 새벽5시 무렵. 에드윈 슈나이드먼은 시계를 본다. TV를 끄고 눈을 감은 지 1시간 반이 지났을 뿐이다. “미세스 위글스”라고 그는 간병인을 소리쳐 부른다.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별명 부르기를 좋아한다. 다른 방에 앉아있던 폴린 두푸이는 듣던 CD를 끄고 읽던 성경을 내려놓고 그의 방으로 건너온다. “무릎이 아파” “진통제 드릴까요?” “응” “트라마돌 드릴까요? 아니면 바이코딘이요?” “아무거나”
평생을 죽음연구에 바친 90세 UCLA 은퇴교수의 관조
“혼자 사막을 운전중 갑자기 엔진이 멈추는 것과 같다”
면도도 안하고 머리는 헝크러진채 그는 침대 한 옆에 누워있다. 그는 삶의 숨결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세상의 아름다움이 손닿을 수 없게 멀어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보며 90세까지 살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는 평생 동안 이 순간에 대해 연구해 왔다. 자살한 사람들과 자살을 하려던 사람들, 철학자와 동료들, 학생과 친구친지들의 경우를 통해. 그래서 얻은 결론 중엔 별로 놀랄만한 것은 없다.
오늘은 어제와 같을 것이다. 내일도 같을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매일이다. 고통 없이 가는 ‘좋은 죽음’이 하나의 희망일 뿐이다.
간병인들이 교대로 출퇴근 할 뿐 그는 먼저 간 아내와 50여년전에 함께 샀던 집에서 혼자 산다. 자신의 생의 의미, 세상의 기억 속에 남을 자신만의 자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혼자 지낸다.
“굿모닝” 버넷 엘리히오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짚어준다. 아침 7시, 간병인의 임무교대가 이루어졌나 보다. 버넷은 앞으로 12시간동안 그를 보살필 것이다. 하얀 긴 셔츠 잠옷을 입은 에드윈은 마치 디킨스 소설 속 인물처럼 보인다. 버넷의 도움으로 체크무늬 로브를 덧입은 그는 침대옆 의자로 옮겨 앉는다.
그의 네 아들은 자주 전화를 해 온다. 그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모두 타주에 살고 있다. 물론 가까이 살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만 그는 아들들의 사정을 이해한다.
버넷이 그의 혈압을 잰다. 혈압기의 진동음, 그리고 맥박을 측정하는 삐- 소리가 울릴 뿐 방안의 정적은 바다 속처럼 깊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가 일생동안 연구해온 과제다. 1955~66년엔 LA자발예방센터 공동설립자와 공동책임자, 1966~69년엔 자살예방 연구를 위한 전국정신건강센터 소장, 1970~88년엔 UCLA 사망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은 어떨까에 대해 묻는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 “당신이 혼자 사막을 운전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엔진이 멈추어버린다. 근처엔 도움이 될 만한 오토 클럽도, 펩 보이스(자동차 부품상)도 보이지 않는다. 길이 계속 뻗어있을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신을 위한 길은 거기서 끝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힘든 것은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있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불면과 걱정, 소멸되어가는 자존심,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 존중해달라는 호소, 기억하려는 몸부림 등을 견디어 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품위와 선의를 지키려는 노력이 짓밟힐 때도 있다. 지난해 그는 한 간병인에게 강도를 당하기도 했다.
고혈압, 당뇨, 전립선암에 심장질환 등을 앓고 있는 그의 남아있는 예상수명은 보험통계표에 의하면 3.8년이지만 더 길 수도 있다. 자살용 권총구입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자살은 자신의 일생 업적과도 맞지 않고 아들들에게도 상처가 될 것 같아 포기했다. 8년전 심장마비 발작 몇분만에 사망한 아내 지니처럼 고통 없는 ‘좋은 죽음’이 자신에게도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해 줄 뿐이다. 2년전 그에게도 죽을 기회가 왔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실려가던 그는 앰뷸런스 유리천정을 통해 하늘과 지나치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곧 모든 게 어두워지겠지라는 그의 기대와 달리 앰뷸런스가 UCLA병원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울었다. 의사들과 심장박동기, 그리고 수없이 많은 약이 자신을 다시 붙잡아 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한 그의 부모들은 고향과는 지구의 반대편인 LA의 유태계 묘지에 묻혀있다.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던 부모들의 어색한 영어와 서툰 매너를 창피하게 여겼던 젊은 날의 철없음은 그가 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다.
1940년대 말 어느 비오는 아침 퇴역군인들의 사망관련 리서치를 위해 검시소를 방문하면서 그는 죽음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검시소 지하실 한편에 수북히 버려진 수백개의 자살 쪽지들을 발견한 것. 절망과 좌절을 호소하는 그 아픈 언어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후 자살을 비롯한 죽음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온 그는 지난해 출판한 ‘죽음의 상식서’를 비롯, 20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어제는 반가운 우편물을 받았다. 주디 콜린스가 보내온 사진화보집이었다. 저명한 가수 콜린스가 그를 방문한 것은 4년 전이었다. 아들의 자살에 관해 그에게 긴 이야기를 털어놓은 콜린스는 뒷마당 포치에서 한동안 울다 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20여권에 달하는 그의 죽음 관련 저서를 읽고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위로를 얻어 간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영혼들이 이승의 마지막 강을 건너도록 안내하는 나루지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침대위 천정엔 샤갈의 그림이 붙어있다. 파스텔 빛 하늘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있는 장면이다. 오랜 세월 아내와 함께 누워 바라보던 그림을 지금은 아내가 남겨놓은 빈자리의 고통을 느끼며 혼자 바라본다. 죽음은 상실이다. 생명의 상실일 뿐 아니라 물건에 담긴 의미도 사라진다. 그가 죽으면 수많은 추억이 담긴 샤갈의 그림도, 그의 책들도, 뒷마당의 비너스 조각도 모두 그저 하나의 물건이 될 것이다. 아들들은 모두 버리거나 처분할 것이다.
천국도, 지옥도 그는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반박할 의도는 없다. 그저 그 자신이 성경보다는 ‘모비 딕’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오랜 세월 죽음을 연구해 왔고 지금 죽음을 기다리는 그가 내린 결론은 그렇게 단순하다 :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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