깅리치 하원의장 간곡한 부탁으로 발굴 현장 찾아
초라한 하노이·가난한삶, 6·25때 서울모습 오버랩
“유해 1구당 100만달러” 미정부 희생 추모에 뭉클
한번은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발굴작업에 미 의회를 대표해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마도 갈만한 의원들이 없기에 나에게 가라는게 아닌가 싶어 알아 봤더니 과연 아시아태평양 소위 위원 중 가겠다는 의원이 하나도 없어 결국 내가 선택된 것이었다.
기분이 상해 그만 두려다가 깅리치 의장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칠수 없어 여행에 나섰다. 대개 의원 혼자서 가는 경우는 드물지만 베트남에는 의원들의 이런저런 핑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할 수 없이 보좌관 한 사람을 데리고 혼자 떠났다. 유럽이나 캐나다, 또는 남미라면 가겠다는 의원들이 많을 텐데 베트남 여행은 인기가 없었다. 나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처음 가게 되는 베트남이 궁금하기도 해서 길을 떠난 것이었다.
비행기를 두어 번 갈아탄 끝에 지금은 호치민 시로 불리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활주로를 바라보니 여기 저기 군인들이 ‘따발총’을 어깨에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내 어린 시절, 6.25전쟁 때 북한에 의해 함락된 서울에서 봤던 인민군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언짢았다. 베트남 군인들은 키도, 군복도 어쩌면 그리도 그 때 본 인민군들을 닮았던지… 초라한 비행장에 착륙해 트랩을 내려서자 성조기를 단 미국산 검정색 세단이 다가와 나를 태워 비행장을 빠져나갔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미 해병대들의 깍듯한 경례와 경호를 받는 기분도 괜찮았다.
차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면서 나는 초라하고 가난한 시가지의 모습에 놀랐다. 하노이 시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중심가에도 시커먼 5층짜리 빌딩 두어개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건물 오른쪽에 대리석으로 만든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보였다. 주위가 모두 초라한 탓에 유난히 더 돋보인 그 빌딩이 바로 내가 머물 호텔인데, 하노이에는 호텔다운 호텔이 그 곳 뿐이어서 미국대사관은 그 호텔만을 사용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그 호텔을 바로 한국의 대우건설이 건축했고, 호텔 뿐만 아니라 옆의 고층 사무실 빌딩을 모두 대우에서 소유,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가슴이 뿌듯해지고 자랑스러움에 어깨가 으쓱했다.
그 날이 마침 미 대사관저가 새 건물로 옮긴 첫 날이라 내게 입주 환영 테이프를 끊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테이프를 끊고 사진을 찍은 뒤 안에 들어가보니 좁은 4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층계를 통해 올라가느라 숨이 가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옛 미 대사관에 가봤다. 이곳 저곳 허물어진 곳을 감쪽같이 수리해서 마치 박물관 같이 꾸며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군 헬리콥터에 베트남인 직원들이 매달려 가다가 떨어지고, 일반인들이 필사적으로 대사관 담장을 넘는 처절한 광경이 연출된 장소가 이곳이다. 당시 그 현장은 전세계 텔레비전 뉴스에 생중계됐었다. 그날 저녁 대사관 주최로 어느 베트남인이 운영하는 최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1954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던 탓에 베트남인이 운영하는 프랑스 식당이 많았다. 8,3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베트남의 역사도 어찌 보면 한국과 비슷하다.
이튿날 아침 커피를 마시러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김우중 회장의 부인을 소개받았다. 그 당시 두 분이 호텔을 운영했는데 부인은 키가 훤칠하게 큰 미인이었다. 호텔 뒤뜰에는 무척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춘 수영장이 있었지만 베트남인들은 너무 비싸 못 들어오고 한국과 미국에서 여행 온 투숙객들이 손님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별로 붐비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날 아침 검정색 대형 포드 SUV를 타고 대사관 직원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산길을 따라 미군 유해발굴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신호등에 걸려 차가 정지하면 유리창 밖으로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잔뜩 몰려들어 안을 들여다보며 껌을 팔려 하거나,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 관용 차량에 달려들어 구걸하는 것을 보니 6.25 직후 한국의 가난했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돈을 주려고 하자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운전하기가 어려워지니 아이 한 명에게만 얼른 1달러만 주고 달리자는 얘기가 나와 난 그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움직이는 차에서 뒤를 바라보니 수십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먹어 살을 빼느라 운동을 하는 뚱뚱한 미국인들의 모습과 뼈만 남은 이들, 6.25 직후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먹을 것을 찾아 다니던 비참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러다 현재의 내 모습이 너무도 감사해 하나님께 연거푸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옆에서 대사관 직원이 나더러 괜찮냐고 묻기에 나도 어렸을 때 이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음이 울적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두 시간 남짓 울퉁불퉁 농촌 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발굴 현장에서는 50명 남짓한 베트남 아녀자들이 조심스레 땅을 파헤치면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브리핑을 통해 들어 보니 바로 그 곳 뒤 언덕 너머에서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따라 근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전사자들의 유품이나 목에 걸었던 인식표 등 뭐라도 찾기 위해 벌써 거의 한 달을 이 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 때까지 아무 것도 나온 게 없고 쇳조각 몇 개만 발견했는데, 그나마 비행기 잔해가 아니라는 실험 결과가 나와 일주일쯤 더 찾아본 뒤 다른 장소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아녀자들은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서로 웃어가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그 곳에서 하루에 버는 돈이 남편들의 한달 벌이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미 해병대원들과 함께 따뜻하게 데운 ‘깡통’ 음식을 점심으로 먹으며 들은 얘기에 따르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봤다는 장소 10 군데 중에 유골과 유품이 발견되는 경우는 한 곳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은 발굴된 유해가 미군의 것임이 확인되면 베트남 정부에 유해 한 구 당 1백만달러를 지급했다. 미국은 방식으로 수천 개의 유해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 발굴된 유해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면 미 정부는 왜 이처럼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베트남의 산골짜기 곳곳을 뒤져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희생된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미국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지금은 일시 중단됐지만 미국은 북한 지역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의 유해를 찾고 있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미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미국민의 유해를 기어이 찾아내겠다는 미국 정부의 이런 노력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사기를 높일 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미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충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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