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이 한 유치원에 다니는 4명의 플러싱 주부들, (왼쪽부터) 윤수현, 정혜영, 임현정, 김정신씨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커피 한 잔도 부담스런 요즘이지만 좀 더 나은 새해를 기대하며 밝은 얼굴을 짓는다.
같은 유치원에 자녀들이 다니는 4명의 ‘플러싱 주부’들이 19일 오전 아이들을 학교에 바래다 준 후 인근 제과점에서 모여 커피 한잔을 나누었다. 4학년 된 큰 애를 포함 3명의 자녀를 둔 임현정씨와 5살, 3살 두 자녀를 둔 정혜영씨, 역시 같은 나이의 남매를 가진 윤수현씨, 그리고 윤씨의 친정 어머니 김정신씨였다.
방학을 앞두고 선생님들에게 전달할 선물 구입을 의논하다가 쏟아지기 시작한 함박눈을 창밖으로 보면서 한마디씩 한다. “ 많이 내릴 눈이네. 쌓이겠다.” “ 오늘 길 많이 막히겠다, 이런 날은 열차도 잘 고장나던데...” “ 이런날은 사람들 샤핑하러 나가지도 않겠다.” 올해 처음 내
리는 탐스런 함박눈을 보면서도 낭만적인 감상보다는 남의 장사까지 걱정하는 말이 먼저 나온다. 제과점 밖에 놓인 대형 트리에 눈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정씨가 “올해 트리 하나 새로 살까 하다 말았어” 라고 하자 “ 우리집은 4년째 같은 트리야.” “ 4년? 우리집은 7년째야. 큰 애가 맨날 똑같은 트리에다 장식한다고 얼마나 툴툴대는 데”라는 말이 뒤따른다.
아줌마들의 가벼운 커피 타임에도 어제 본 한국 드라마 비디오나 남편 흉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들이 저절로 나오는 팍팍한 분위기의 연말 풍경이다. 특히나 이들은 “이제 진짜 돈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기의 자녀들을 두고 있는 주부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들어오는 건 비슷한 데 나가는 것만 많아지기 시작하던 올해, 수십 년만이라는 경기침체가 덮쳐 근심이 크다. 80년대 중반 이민 온 김정신씨는 “ 20년 넘게 미국에 살았지만 올해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건 첨 봤다”고 말한다.
이들 중 유일하게 가계부를 꼬박꼬박 작성하는 정씨가 “무엇보다 시장 물가가 작년이랑 비교해 너무 올랐다”고 말하자 모두 동의한다. 다른 건 줄여도 한참 크는 애들 먹는 건 줄일 수 없는 데 장보는 비용이 너무 늘어났다는 것. “ 이천쌀 40파운드를 작년엔 16.99달러에 샀는데 올해는 24.99달러 줘야돼요.” “ 한 마디로 예전엔 20달러치 사면 3일도 먹었는데 이젠 최소한 40달러 이상 들어가요.” 임씨가 “그나마 개스비가 떨어져서 다행이지 여름에 4불까지 올라갔을 때는 이젠 차도 못갖고 다니겠구나 싶었어요”라고 말하자 다시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개척교회 목사인 임씨의 남편을 포함 이들의 남편들은 모두 주급을 받는 직업을 갖고 있다. 올해 얼마나 소득이 늘었냐고 묻자 조금이라도 늘었다는 사람이 없다. 명절과 연말이면 생색용이라도 나오던 소액의 보너스마저 없어져 오히려 줄어든 셈. 그러나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짤리지 않고 꼬박 꼬박 주급 가지고 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미국에서는 자기 사업이 최고라는 말을 입증하며 월급쟁이 남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집에 가져오던 주위 사람들 혹은 친지 자영업자들이 요즘 얼마나 고전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주를 오가며 도매업을 하는 지인이 교통비 증가와 판매 급락, 수금 미수로 망했다는 사연, 실직한 친구 남편이 롱아일랜드 일식당의 운전사 구직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새벽부터 6명이나 줄을 서있더라는 등의 사연이 이어진다. 아직은 ‘주변 사람들의 사연’이지만 언제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느껴진다.정씨에 따르면 남편이 근무하는 맨하탄 42가의 대형 델리에도 눈에 띄게 손님이 줄었다. “워낙 사무실 밀집지역에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라 그동안 한 번도 경기를 타본 적이 없는 곳이거든요. 스시 전문가인 남편이야 괜찮겠지만 그래도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더 크는 내년에도 불경기가 지속된다는 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가 큰 걱정이다. 남편 소득에 변함이 없다면 살림이라도 줄여야 되는 데 사실 별로 줄일 만한 부분도 없다. 얼마전 뉴욕타임스에 소득이 줄어들어 ‘가정부와 보모들을 내보내야 하는 맨하탄 중산층 주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실리기도 했지만, 사치나 낭비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는 ‘섹스 앤 시티’의 4명 주인공들만큼이나 딴 세상에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발비를 아끼기 위해 결혼한 후 7년 동안 줄곧 남편 머리를 직접 잘라주는 윤씨를 포함해 “짤래야 더 짤 것도 없는” 알뜰한 플러싱 한인 주부들은 이제 정말 마른 수건이라도 떠 짜야 할 형편이다.
대부분 한달에 두어번 하던 외식을 아예 없앴지만 정씨는 오히려 외식을 늘렸다고 답했다. 일일이 장을 봐서 상을 차리는 것이 오히려 지출이 많은 것 같아서다. 정씨는 “ 한국에서는 요즘 식구들이 외식 나가서 곱빼기 자장면 한 그릇을 나눠먹는다는 말도 있는 데 런치스페셜 한 그릇 주문해 아이들과 나눠먹는 것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자녀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구디백(Goody Bag)’도 올해는 생략. 다니는 교회에서는 서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연말에 선물 안하기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편 정씨는 1만 6,000달러였던 신용한도를 카드사가 8,000달러로 뭉텅 줄인 것도 마음에 안든다. 피치 못하게 돈이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목돈이 없을 때는 카드 빚을 얻어야 하는 일도 있는데 불안하다. 부업을 고려해 본적도 있지만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운좋게 파트타임 일을 구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을 애프터 스쿨이나 베이비 시터에게 맡겨야 하는데 결국 그돈이 그돈이다. 자녀가 3명이나 되고 교회일도 돌봐야 하는 임씨는 애초부터 “인형에 눈알 붙이는 부업조차” 생각해 본적이 없고 치과 간호사로 파트타임일을 하는 정씨가 그나마 형편이 난 편이다.
그러나 다가올 2009년이 마냥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알뜰함이란 미덕과 낙천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1, 2년 잘 버티면 좋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우리가 언제는 펑펑 쓰면서 살았나요? 지금보다 좀 더 아낀다고 생각하면 되요. 애들도 아직은 돈을 모를 때니까...” “개척 교회 목사 사모님으로 10여년 살아온 사람인데요 뭐. 어려운 일 헤쳐 나가는 건 자신있어요” “ 지금 하는 치과 간호사로 시간 안 줄어들고 남편 직장 잘 다니면 그럭저럭 견디겠지요”4명의 주부들은 한참을 의논한 뒤에 15달러짜리 타켓 상품권으로 선생님들의 선물을 결정했다.
<박원영 기자> wy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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