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불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 여기저기서 힘없이 무너지는 한인가정이 많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힘이 들고 지쳐갈수록, 현실의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가족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가정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모범 한인가정의 삶을 엿보면서 어려운 시기에 새롭게 출발하는 2009년 새해 아침에 새로운 소망을 품어보자.
■다운증후군 딸 키우며 행복 찾아가는 이명주·이정숙 부부
첫 폭설이 수북이 쌓인 집 앞마당.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언니 주희(7)와 동생 소희(5)는 아버지 이명주씨와의 눈싸움에 마냥 신이 났다. 까르르~ 까르르~ 연신 터지는 웃음꽃은 이내 집안으로 이어졌다. 음악이 흐르자 서툰 발레 동작으로 거실의 중앙 무대를 장악한 것은 바로 주희였다. 주희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에는 따뜻함과 흐뭇함이 한껏 배어있다.
저희 부부에겐 첫 아이였고 집안에선 첫 손자였는데 당연히 기대감이 컸죠. 임신기간 중에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도 엄청 컸고 주변에서는 모두 낙태를 권했지만 저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이정숙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요즘은 태아에게서 장애가 발견되면 미리 낙태를 하기 때문에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부부의 요즘 고민거리다. 주희처럼 다운증후군을 앓으며 성장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만큼 관련 서비스와 시설, 자원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주희는 유달리 붙임성이 좋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가족들에게 있어 주희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자 삶의 이유로 자리 잡았다.
부부는 주희 때문에 가족 모두가 웃는 일이 많아요. 주희를 낳지 않았다면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곧잘 하죠. 주희를 안아줄 때마다 ‘주희야! 엄마아빠에게 와줘서 너무 고맙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라며 웃는다. 주희를 통해 부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고 따뜻해졌다고 고백한다.
브롱스에서 살다가 1년 반 전 퀸즈 프레시메도우로 이사 오면서 집안에 텔레비전도 없앴다. 그 후로 가족들 사이에는 대화가 많아졌다. 주희와 소희가 집안의 중심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텔레비전 없이도 아이들이 잘 노는 것이 신기했다는 부부는 가능하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 가까운 서점을 자주 찾기도 하고 함께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놀이도 즐긴다. 장애를 지닌 큰 딸과 한창 신체활동이 왕성한 둘째 딸을 돌보느라 부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칠까 염려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자주 갖도록 배려하는 것은 늘 할아버지·할머니가 먼저다. 할아버지 이관우씨는 손녀 둘의 등하교를 매일 챙기면서도 오전에는 경로센터로, 오후에는 컴퓨터 교실로 향하며 아직까지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개발하는 일에 열심이다.
할머니 이정혜씨는 유타를 오가며 사업가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미술가인 며느리 정숙씨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도록 최소 주 2회는 스튜디오에서 창작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시아버지고 남편도 한 몫 거들었다. 할아버지 이광우씨는 장애 아이들이 크면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해준 부모를 원망한다지만 그건 부모가 잘못 키워서 그런 것이라며 손녀 딸 자랑이 이어졌다.
70년대 중반에 유학 와 80년대 말까지 브리검영 대학 한국어 교수를 지냈던 이광우씨는 아들 셋을 모두 의사로 키워냈고 며느리들도 예술분야인 정숙씨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의사들이다. 소위 잘나가는(?)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이 모두 착하고 바른데다 장남내외, 손녀들과 한 집에 살고 있다 보니 늘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며 털털 웃었다.
아버지 명주씨는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돈을 벌려고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지나친 야망 추구도 물론 거절한단다. 부부가 주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사랑을 베풀고 또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이광우씨는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울수록 가정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우리처럼 장애아를 둔 가정도 이렇게 밝고 힘차게 살고 있는데 아무리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가족이 함께 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며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부는 치과의사인 가장을 뒀으니 다른 장애가정보다 형편이 낫지 않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맞는 말이죠. 저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보험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무료 치료 봉사를 이제 막 시작했어요. 주희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활동을 차츰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며 밝게 웃었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 덕분에 진정한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이명주·이정숙씨 가족. 오른쪽부터 이명주씨, 둘째 딸 소희, 할아버지 이광우씨, 첫째 딸 주희, 이정숙씨, 한국에서 유학 와 머물려 든든한 사촌오빠 노릇을 하고 있는 이정숙씨의 외조카 노승혁군.
■결혼생활 72주년 5대 한가족 72명 김관국·원금녀 부부
2년 전 결혼 72주년을 맞이하며 금강혼식을 치른 김관국(90)·원금녀(91)씨 부부. 아들 셋과 딸 셋 등 6명의 자녀와 사위, 며느리, 손자손녀, 손녀사위와 손자며느리, 증손자들까지 모두 5대에 이르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면 무려 72명이나 된다. 이중 호주에 사는 딸 가족을 제외한 나머
지는 모두 뉴욕 일원과 로드아일랜드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부부는 아흔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돋보기 없이 신문도 읽고 보청기 없이 전화통화도 너끈하다. 새벽예배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흔한 감기 한 번 앓은 적이 없을 만큼 체력도 튼튼하다. 다만 집 앞 텃밭에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각종 나물과 야채를 키우며 농사일도 부지런히 했지만 올해는 아내 원씨의 관절염 때문에 농사를 한 해 쉬었을 뿐이란다.
이웃은 물론, 교인들과 가족들에게 직접 기른 나물을 나눠주는 재미로 솔솔 했는데 올해는 못내 아쉽다고.
부부의 남다른 건강 비결을 묻자 “마음이 편하고 걱정근심이 없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자손손 말썽쟁이도 하나 없고 모두가 서로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이 부부에겐 그저 행복이다. 자녀들도 모두 평안하고 서로 부모를 극진하게 섬기는데 앞 다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자의 영역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부부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일이란다.
한국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70년대 이민 와 로드아일랜드대학에서 20년 이상 청소업을 해왔던 김씨는 은퇴연금과 웰페어만으로도 넉넉한 노후를 보낼 수 있어 늘 감사하다고 말한다.아내 원씨는 자녀들이 보내주는 용돈을 꾸준히 모아 두었다가 손자손녀, 증손자증손녀들이 태어날 때마다 각자 앞으로 수천달러씩 은행 저금통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또 다른 낙이다.
자녀들은 물론, 모든 가족들이 우애 있게 지내는 특별한 자녀교육 비법에도 부부는 “별다른 것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뉴욕사무기를 운영하는 장남 김명덕 사장은 어릴 때부터 형제들의 우애를 강조해 온 부모님들의 자녀교육은 남달랐다. 부모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자매들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고 우리 자녀들과 후손에게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만큼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함경도가 고향인 노부부는 월남 후 온갖 고생을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이 똘똘 뭉쳐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 나갔고 늘 가족의 중요성을 말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본을 보였다는 것. 이러한 부모님의 가르침이 오늘까지 모든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초석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노부부와 이들 가정에 아무런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2년 전에는 둘째 사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5년 전에는 맏며느리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가족을 잃은 깊은 슬픔 속에서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늘 가까이에서 함께 하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늙은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새벽기도에 매일 나가 자식들과 후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어른 공경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손자손녀, 증손자·증손녀들도 자연스럽게 어른을 위할 줄 알고 할아버지·할머니, 증조할아버지·증조할머니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여긴다고.
김씨는 요즘은 세대가 많이 달라져 세상이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데에서 시작된다. 가족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위하는 마음을 갖다보면 가정에 화평이 찾아오고 사회도 남을 먼저 배려하다보면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명덕 사장도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때이다. 나만 힘들고 나만 어렵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가족이 합심해 하나가 되어 무엇이든 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법이다. 새해에는 가족들 사이에 쌓인 갈등의 골이나 감정의 골을 풀고 묵은 감정도 훌훌 털고 모든 가족이 하나가 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 5대까지 후손을 번창시키며 대단한 가족애를 자랑하는 김관국·원금녀 노부부. 2년 전 결혼 70주년 금강혼식에 참석한 70여명의 후손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모습이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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