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메르트 총리, 국방·외무 소집… 하마스 “국경봉쇄 풀면 논의”
이스라엘 정부가 30일 하마스와의 한시적 휴전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저녁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과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을 소집해 하마스와 48시간 동안 휴전에 들어가는 방안을 논의키로 했다고 AFP 통신 등이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48시간 휴전안은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이 바라크 국방장관과 전화 회담을 하면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국경 봉쇄를 해제한 이후에야 휴전안을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마스의 대변인 무쉬르 마스리는 “만약 이스라엘이 공격행위를 중단하고 국경 봉쇄를 푼다면 하마스는 휴전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AP 통신에 말했다.
앞서 이스라엘은 이날 새벽 공군기를 발진시켜 가자지구 내 주택가 근처에 있는 하마스 정부의 외무부와 재무부 건물 등 행정청사 5곳에 잇따라 폭탄을 투하했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이로써 개전 이후 이스라엘의 공습에 희생된 가자지구 주민 수는 최소 369명으로 늘었고, 부상자 수도 1,720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의 폭격에 맞서 하마스도 나흘 동안 250발 이상의 로켓탄과 박격포탄을 이스라엘 쪽으로 발사했다.
또 하마스가 처음으로 사거리 40km 그라드 미사일 2기를 발사해 이스라엘 남부 도시 브에르 쉐바를 강타했다고 이스라엘 일간 마리브가 31일 보도했다.
신문은 그라드 미사일이 강타한 브에르 쉐바는 총 인구 25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이며 현재까지 하마스가 발사한 미사일 중 가장 사거리가 긴 미사일이며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하마스는 사거리 20~30km 로켓을 주로 발사해 왔으며 30일 이스라엘 해변 도시 아쉬도드와 아쉬켈론에서 2명이 로켓공격으로 사망했다.
한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비난해 왔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과도한 군사적 대응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세계 지도자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unacceptable) 폭력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촉구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 ‘60년 뿌리깊은 반목’
이스라엘·하마스 왜 싸우나
이번 사태는 하마스가 이스라엘군과 교전 중 무장대원 1명을 잃고 보복 차원으로 박격포 공격을 감행하면서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갈등은 60년 전 이스라엘의 건국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은 유엔 결의안에 따라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아랍권에 유대국가 탄생을 용인할 수 없다며 이집트 전투기들이 곧바로 텔아비브를 폭격하며 아랍연합군과 이스라엘간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지만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로 팔레스타인 전체 면적 중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제외한 78%를 차지하게 됐다.
1차 중동전쟁의 아랍측 패배로 팔레스타인 인구 110만명 중 70만명은 고향에서 쫓겨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등 주변국에 흩어져 처참한 난민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나라 없는 설움을 겪으며 2천년을 떠돌았던 유대인의 나라가 세워지는 순간, 팔레스타인에는 `대재앙’(나크바)이 시작된 것이다.
1967년 6월 발발한 3차 중동전쟁의 아랍측 패배는 팔레스타인에 더욱 큰 좌절감을 안겨줬다. 전쟁에 승리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까지 점령하면서 이들 2곳의 팔레스타인인 100만명이 이스라엘 점령 하에 생활하게 된 것이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도 결국 아랍권의 패배를 지켜보게 된 팔레스타인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점령자인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분노는 1987년 인티파다(민중봉기)로 강하게 표출됐다. 팔레스타인 청년 4명이 이스라엘군 지프에 치여 숨진 사건이 원인이 된 1차 인티파다는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거리로 나와 이스라엘 경찰과 맞서며 1993년까지 계속됐다.
인티파다로 많은 인명피해를 입게 된 양측은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최초의 협약인 오슬로협약을 체결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1996년 오슬로협약 반대파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에 오르면서 양측간 긴장은 다시 고조됐다.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테러가 잇따르자 이스라엘은 2002년 3월 요르단강 서안에서 분리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분리장벽으로 통행의 자유가 차단되면서 프랑스 일간 르몽드 표현대로 `하늘만 열린 감옥’에서 살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온건파보다는 강경파를 선호하게 됐다.
강경 무장 정파 하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132석 중 72석을 차지, 온건파인 집권 파타당을 누르고 다수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듬해 하마스와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지난해 6월에는 파타 계열 보안군을 몰아내고 가자지구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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