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아니 새로운 책이 시작됐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올 초만 해도 흑인이 새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버락 오바마 자신을 포함해 거의 없었다. 민주당 당내 경선은 민주당내 돈과 조직을 쥐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로 끝날 것이 당연시 됐고 설사 당내 지명을 따낸다 해도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깨고 흑인이 백악관을 차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권자 마음 읽는 혜안
이런 불가능의 벽에 오바마는 자신을 던져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냈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약관의 나이에 변화를 갈구하는 미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바로 읽고 스스로를 ‘변화의 사도’로 내세운 그의 결단이 주효했다. 그가 띄운 희망의 꿈은 긴 이라크 전쟁과 경기 침체,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의 온갖 실정에 지친 미국인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평소 정치에 냉소적인 젊은 대학생들이 앞 다퉈 자원 봉사자로 캠페인에 뛰어들고 10~20달러의 소액 헌금이 인터넷을 통해 몰려들었다. 보통 때 같으면 약점으로 잡혔을 짧은 정치 경력은 오히려 참신함으로 비춰졌고 일찍부터 그가 외쳤던 이라크 침공 반대의 목소리는 기성 정치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혜로움으로 평가됐다. 긴 캠페인 기간과 3차례에 걸친 토론에서 보여준 그의 침착함은 백전노장 존 매케인보다 더 ‘대통령스럽다’는 평을 받았다.
금융위기로 사실상 승부나
운도 따라줬다. 매케인이 자격미달의 새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택하는 깜짝쇼로 인기 회복을 시도한 순간 100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와 함께 닥친 경제 불안은 선거 제1의 이슈로 떠올랐고 유권자들의 표심이 집권당인 공화당에 대한 분노로 돌아서면서 사실상 선거는 끝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인종이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미국 사회 전반, 특히 젊은 지식인층에 널리 퍼졌기에 가능했다. 공화당 일각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소위 ‘브래들리 효과’는 이번 선거를 통해 역사의 유물로 사라지고 말았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흑인은 사실상 투표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을 기억하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오바마의 당선은 한인 등 소수계 이민자 사회에서는 더욱 뜻 깊은 사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민자도 아니고 흑인 유학생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의 아들딸이 언젠가 백악관의 주인이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이 헛된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얼마나 훌륭한 정치를 펼지는 지금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직도 미국 곳곳에 남아 있는 인종 편견과 기존 워싱턴 정가의 두터운 벽, 그리고 무엇보다 갈 길이 먼 금융 위기의 해빙까지 난제가 첩첩이 싸여 있다.
사라진 ‘브래들리 효과’
그러나 흑인이 3억 미국인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세계인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존재는 ‘미국은 백인들의 나라로 안으로 소수계를 차별하고 밖으로 제3세계인들을 업수이 여기는 나라’라는 편견을 갖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은 흑인 노예부터 침략 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잘못을 저지른 나라다. 미국의 위대함은 이를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해왔다는 데 있다. 내년은 흑인 노예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390년이 되는 해다. 이번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은 뿌리 깊은 약점의 하나인 인종차별 해소를 위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며 이것이 미국이 진정으로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대접받는 사회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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