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마지막 진지한 방송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대체할 수가 없지요”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의 목소리, 보도방식, 그의 친근한 태도와 매너를 사랑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었습니다” - 지난주 KTLA-TV 웹사이트를 가득 메운 시청자들의 글들이다. 지난 7일 채널 5 KTLA의 간판 앵커 핼 피시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시청자들은 죽마고우라도 잃은 듯 애도의 봇물을 이뤘다.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채 몇 시간이 안 되어서 KTLA 웹사이트에는 그를 추모하는 글이 2,000개가 넘었다.
KTLA 저녁뉴스로 친근한 핼 피시먼 작고
“이 시대의 마지막 진지한 방송인”평가
<비행기 조종사 피시먼. 프로에 가까운 비행실력을 가졌었다.>
1975년부터 지난달까지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그 날의 뉴스를 전하던 앵커 핼 피시먼은 남가주 주민들에게 친지나 다름없다. 그가 LA에서 TV 방송을 시작한 게 1960년이고 보면 남가주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대한 건 거의 50년. 남 같지 않은 친숙함을 그에게서 느낀다.
와츠 폭동, 로버트 케네디 암살사건, 노스리지 지진, 로드니 킹 구타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남가주 주민들은 그를 통해서 사건의 진상을 듣곤 했는데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났다. 밤 10시 ‘KTLA 프라임 뉴스’ 시청자들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없을 수 없다. 피시먼이 마지막 방송을 한 것은 지난달 30일이었다. 그 며칠 전 대장암 진단을 받고는 퇴직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8월1일 집에서 쓰러져 입원했는데 암은 이미 간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그 며칠 후인 7일 새벽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렌트우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75세였다.
그는 최장기 앵커맨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오랜 세월 뉴스 보도 일선에 있었던 인물이다. 지난달 31일 KTLA 창립 60주년 기념 파티에서 기네스 세계기록 사는 1960년 6월20일부터 쉬지 않고 TV 방송인으로 일해 온 그의 기록을 인정, 장기근무 확인 증서를 보내왔다.
하지만 방송계나 시청자들이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오랜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시청률에 끌려 다니느라 뉴스 보도가 쇼 프로그램처럼 바뀌고 앵커가 연예인처럼 바뀌는 세태 속에서 피시먼 같이 정도를 걷는 방송인을 더 이상 찾기 어려운 때문이다.
USC 저널리즘 교수인 조 살츠만은 말한다. “대중들에게 정보를 주는데 주력하던 옛날식 방송기자로는 그가 정말이지 마지막이다. TV뉴스가 유명인들이나 쫓아다니고 추격전이나 보도하는 그런 바보 뉴스가 되는 현실에 대항해 그는 오랜 세월을 싸웠었다. 그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뉴스, 알맹이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했다. 요즘 같은 뉴스 시장이라면 핼 피시먼은 취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해박한 지식도 화젯거리이다. KTLA의 보도국장으로 오래 일했던 제프 왈드는 그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렀다.
“천재라는 말에 그만큼 가까웠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는데 읽은 모든 것에 대해 거의 사진 찍은 듯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러다보니 앵커 보도용으로 기자가 써온 기사나 통신사에서 받은 기사보다 종종 더 내용을 잘 알아서 그의 즉석 해설이 작성된 기사보다 더 정곡을 찌르곤 했다.
아울러 그가 수십년간 앵커로 장수한 비결로는 그의 신뢰성이 꼽힌다. 정직하게, 책임감 있게 보도를 해서 그의 뉴스는 믿을 수가 있다는 평판을 얻은 결과이다.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정확성을 따졌었다고 그의 동료들은 전한다.
<브렌트우드의 농부. 집 텃밭에서 농사 짓기를 즐겼다.>
그 자신도 생전에 말했었다.
“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방송인도 아니고 드러매틱한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바로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장수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47년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많은 상을 받았다. 1987년 TV 예술학회 LA 지부로부터 주지사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AP TV 라디오협회가 처음 제정한 평생 공로상을 받았으며, AP로부터 3년 연속 ‘최우수 앵커상’을 받았다. 2004년과 2005년에는 남가주 라디오 TV뉴스협회 선정 최우수 뉴스 해설가의 영광을 누렸다.
1992년 할리웃 명성의 거리에 이름이 올랐고, 2000년 그의 방송진출 40주년을 기념해서 KTLA는 방송국 보도실을 ‘할 피시먼 보도실’로 명명했다. 그 외 다른 많은 LA의 TV 방송기자들처럼 그도 ‘LA의 크로코다일 던디’등 영화에 방송기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핼 피시먼 누구인가
정치특강 인연으로 방송계 입문
KTLA 10시 뉴스진행만 32년
1999년 당시 KTLA 10시 뉴스팀과 함께 한 핼 피시먼(왼쪽 두 번째)
핼 피시먼은 1931년 8월25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코넬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UCLA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거의 평생을 몸담은 방송과의 인연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코넬 재학 중이던 어느 날이었다. 어쩌다 대학 방송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누군가가 “테스트 해보러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뭔지 내용은 모르지만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렇다’고 한 것이 마이크를 잡게 된 계기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학계에 몸담을 생각이었다. 칼스테이트 LA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던 1960년 어느 날 또 우연이 찾아왔다. 채널 13 CKOP-TV가 그에게 TV 정치특강을 해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해 여름 LA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데 맞춰 ‘미국의 정당과 정치’라는 주제의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TV 특강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그 자신은 몰랐지만 그 프로그램은 시청률 조사를 받고 있었고 시청률이 인기도를 반영했다. 특강이 끝나자 방송국측은 그에게 아예 방송국으로 와서 정치해설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의 방송 한평생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평생 가르치는 것보다 한번 방송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했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하지만 “항상 방송을 가르침의 연장으로 생각했다”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피시먼은 몇 번 방송사를 옮겼다. 1965년 KTLA-TV로 옮겼다가 1970년 채널 11 KTTV-TV로, 1971년 다시 KTLA로 갔다가 1973년 채널 9 KHJ-TV(현 KCAL-TV)로 옮겼다. 그리고는 1975년 KTLA로 되돌아온 후 지난달 퇴임할 때까지 32년을 한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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