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와 <세상의 모든 아침> : 사랑의 영원불멸함에 대하여
1. 이룰 수 없으므로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진부하고도 막막한 물음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면서도 굳이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글을 시작해 본다.
그것은 삶이 또한 그러하듯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 말하고 표현하려하면 사라져 버리고 사막의 모래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 그러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떨려 오는 영혼의 공명이자 존재의 울림이다.
사랑이 문학과 음악과 영화의 가장 흔하고도 오랜 소재가 되어온 이유 또한 이 ‘진공묘유’함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랑이 단 한줄의 정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수많은 문학가들과 영화인들과 음악가들은 사랑에 대한 속절없는 짝사랑을 불태우지도 않았으리.
신의 손이 아닌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양과 개와 인간의 여러 기관들이 복제되고 있는 과학의 시대. 물론 사랑 또한 그 일부는 과학에 의해 포착된다.
각종의 장비와 라이텍스 장갑을 낀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갖가지의 실험은, 페로몬의 과다분비에 의한 혈류 속도및 심장 박동수와 뇌파의 비정상적 변화라는 지극히 생리학적인 결론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러브 칵테일’이라는 사랑의 묘약 제작에 열을 쏟기도 하고, 한 인간이 상대방을 의식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10만분의 15초라는 영원의 시간을 계산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는가. 그래도 사랑이란 얼음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실험실의 저편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이다.
2. 모호한 사랑의 대상-무엇을 사랑하는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도대체 몇 개의 사랑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시라노>와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서 우리는 지독한 사랑의 고독과 슬픔을 본다.
에드몽 로스탕의 원작 <시라노 드 베르쥬락>을 장 폴 라프노 감독이 영화화한 <시라노>는 17세기 중엽의 파리. 싸움과 도전과 문학을 사랑하는 가스코뉴 지방의 근위대장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다.
시쳇말로 집안 좋고 문무를 가무한 시라노는 8촌 누이동생인 록산을 사모하는데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채 그저 애모해 온지 십 여년. 이유는 단 하나 ‘모자도 걸어둘 수 있을 만큼 큰 코’ 때문이다.
시라노는 록산이 사랑에 빠진 청년 장교 크리스티앙을 대신해서 정열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대필하기 시작하고, 록산의 부탁으로 크리스티앙을 지키기 위해 참가하게 된 전쟁터에서도 그의 편지쓰기와 배달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 사선을 넘나들며 배달되는 이 편지에는 록산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스여져 있고 록산은 그 ‘편지’와 사랑에 빠진다.
어쩌면, 시라노의 대필은 크리스티앙과 록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록산을 향한 자기의 뜨거운 감정을 표현할 길이란 바로 ‘대필’ 밖에 없었던 시라노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끝나고 크리스티앙은 전사한다. 록산은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을 잃고 수녀원에서 미망의 세월 보낸다. 대상이 사람이었든 편지였든 사랑을 잃은 가슴의 공허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것일 터.
적들의 기습에 부상당한 시라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록산이 미망의 몸으로 기거하는 수녀원에 당도한다. 그리고, 록산의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내쉬며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를 꿈꾸듯 읊조리고, 록산은 그녀가 목숨처럼 아끼던 편지의 주인공이 시라노였음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오오, 록산은 크리스티앙을 사랑했던 것인가,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사랑했던 것인가. 우리는 홀리듯 아주 작은 그 무언가를 통해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것이 ‘큰 눈’이거나 ‘통통한 볼’일 수도 있고 꿈결처럼 아름다운 ‘연서’일 수도 있으리라.
어쨋든 우리는 그 사소한 몇 가지에 몸과 마음을 불사르며 하나의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중요한 것은, 시라노와 록산이 그러하듯 우리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상대방에게서 발굴(?)하여, 거침없는 사랑의 열정을 불태운다는 사실이다.
‘그/그녀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고 묻지 말자. 말할 수 없으니까. 그저 그/ 그녀의 모든 것,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면 그 뿐일터.
3. 사랑을 위하여 죽다
비올의 거장 마랭 마레의 회한 가득한 회고담으로 시작하는 <세상의 모든 아침>은 17세기 중반 루이 14세 시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사랑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다.
비올의 대가 생트 콜롱브는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딸들을 데리고 프랑스의 시골로 낙향, 은거생활을 한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인 마랭 마레는 힘들고 지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의 길을 택하여, 콜롱브의 제자가 되지만 콜롱브는 자신의 기법을 마레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다. 그는 스승의 연주를 엿듣고 기슬을 터득하기 위해 콜롱브의 딸 마들렌의 사랑을 이용하고, 마침내 궁정 악사가 되어 마들렌을 버리고 떠나버린다.
마레의 행동에는 일말의 머뭇거림이 없다. 왜냐하면 말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어차피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길에서 필요한 약간의 휴식이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골집에는 절망한 마들린이 남아 있다. 그녀는 상심으로 몸져 누워 몸과 마음을 학대하다가 마레가 선물한 구두끈에 목을 메고 자살한다.
사실, 마들렌의 자살장면은 무척 차갑고 동시에 뜨겁다. 왜 하필 구두끈인가? 그녀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마레의 사랑이 온통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순간 한 번도 신어보지 않았던 그 새구두를 신고 마들렌은 차갑고 눅눅한 죽음의 길을 사뿐히 걸어간다.
사실, 마들렌의 이러한 행위는 거의 편집증이라든가 스토킹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보라. 왜 그녀가 사랑을 죽음과 바꿀 수 밖에 없었는가를. 마들렌에게 사랑은 일종의 포즈가 아니라는 사실, 사랑이 인생을 그저 스쳐지나감이란 그녀에게 생의 파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녀는 자신과 마레의 사랑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이라는 존재를 조각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레와의 사랑이 극광처럼 짧은 것이었다해도, 마들렌은 그것을 죽음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영원으로 만들어 놓는 길을 택한 것이다. 마들렌에게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고 지루한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혹은 하나의 사랑 이후에도 밀물처럼 또다른 사랑들이 밀려드는 그런 것이 아니므로.
4. 청마의 시처럼
<시라노>도 <세상의 모든 아침>도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주었으므로(사운드 트랙도 추천할만큼 좋다) 나는 그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멀고 낯선 세상을 휘몰아 치는 바람과, 그 속을 날으는 색색의 나뭇잎들과, 때대로 하얗게 쌓여가는 눈발을 끝도 없이 바라보며 예의 그 ‘진공묘유’ 네 글자를 다시 생각해 본다.
설명할 길이 없기에 어려우나, 그러하기에 창조해낼 수 있는 사랑의 색채와 형태 또한 무궁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사랑의 도저한 속성일 터.
청마의 시 한수가 생각 키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의 고백처럼, 시라노도 록산도 마들렌도 그저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뼛속까지 행복하였으리라.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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