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들
다시 일어선 이 - 황인기씨
“무엇을 부여잡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지요. 강산이 한번 이상 변한 세월이지만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폭동 때 운영하던 리커스토어가 전소되면서 전 재산 70만달러를 한 순간에 잃어버렸던 황인기(55)씨는 ‘다시 일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기에 성공했지만 15년 전 그 날 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리커 완전 불타 한순간 전재산 날려
곡절끝 그 자리에 코인런드리 열어
7년간 한푼도 못벌다 결국은 해내
후유증 시달리는 사람 아직 많은데…”
잿더미가 됐던 황씨의 사우스LA ‘매스리커’ 자리에는 폭동 2년 후 코인런드리가 오픈했다.
어느 덧 13년. 하지만 코인런드리 업주로 변신하기까지 그가 겪은 몸 고생과 마음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폭동 피해 업소지만 그 자리에 리커스토어를 다시 여는 것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4.29 후 상업지역에서 주거지역으로 조닝을 변경해 버렸다.
시 당국과 맞서기를 두 해. 결국 리커 라이선스를 반납하는 대신 코인런드리를 오픈하고 영업에 필요한 하수도 연결 공사비 25만여달러를 면제 받는 선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폭동은 끝났지만 문제는 계속 생겼다. 황씨의 리커스토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살던 한 흑인 교사가 “황씨 가게에서 파는 맥주 캔들이 자신의 집 주변에 흩어져 집값이 떨어졌다”며 황씨를 제소한 것이다.
한인업주의 리커스토어 재건을 막기 위해 흑인단체들이 뒤를 봐주고 있던 것이었다. 돈과 시간을 담보로 한 길고 지루한 싸움에 힘겨워하던 황씨가 생각해 낸 것은 리커스토어를 커버했던 보험회사였다. 황씨는 결국 보험회사와 함께 2년을 끌어온 법정 소송을 간신히 마무리했다. 하지만 황씨에게는 몸과 마음을 모두 지치게 만든 또 다른 폭동 후유증일 따름이었다.
리커스토어 운영으로 잔뼈가 굵은 황씨였지만 코인런드리 운영도 녹록하지는 않았다. 업종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으니 여기저기서 문제가 튀어나왔다. 자본 한 푼 없이 SBA 융자를 얻고 기계 할부금까지 빚졌으니 한 달에 내는 페이먼트만 자그마치 6,000여달러. 페이먼트를 갚다보니 창업 후 7년간은 집에 페니 한 푼도 들여가지 못했을 정도다. 그나마 폭동 전 구입했던 실버레이크 지역의 리커스토어가 생계의 큰 부분을 담당했다.
하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에 힘입어 비즈니스는 이후 순항을 거듭, 이스트LA 한 곳과 옥스나드 두 곳에도 코인런드리를 열었다.
“사우스LA의 경우 업소에 플라즈마 TV를 설치하는 등 어느 곳보다 깔끔하게 꾸몄어요. 또 비교적 코인런드리 이용률이 높은 히스패닉이 전체 고객의 70% 이상이라 안정된 고객 기반은 확보한 셈이죠.”
황씨는 아직도 많은 폭동 피해자들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다시 일어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그는 “만약 4.29가 없었다면, 제가 승승장구했다면, 얼마나 교만했을까요?”라며 폭동이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또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멜팅팟인 미국에서는 우리 타인종과 함께 어울리고 연대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지혜지요.”
황인기씨가 폭동 때 전소됐던 리커스토어 자리에 재건한 코인런드리 앞에서 폭동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진천규 기자>
“아메리칸드림 잊은 지 오래 상처입은 이들에 더 관심을”
그는 “한인들은 제반환경이 열악했던 사우스센트럴 LA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그저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장사를 했던 한인들은 대다수 저소득층 흑인 고객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 이들을 가족처럼 대했고 이들은 한인 업소들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편리해진 것에 대해 행복해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니 주씨가 폭동이 언급될 때마다 한·흑 갈등이란 단어가 함께 들먹거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
폭동과 한·흑 갈등이 연계돼 회자되는 것을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이렇다. 폭동의 원인이 사우스센트럴에서 돈을 번 한인 업소들에 언짢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흑인들이 로드니 킹 사건이 일어나자 한인 업소들을 대상으로 쌓였던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잘못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처럼 왜곡된 사실이 정설로 굳어져 먼 훗날 미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한인 1.5세 및 2세들에게 그대로 전해질까 두렵다고 했다.
주씨는 폭동 발생 후 폭동으로 전소됐거나 약탈당했던 한인 업소들의 모임 ‘4.29폭동 피해 식품상협회’를 이끌었다.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나이가 30대 중반이라는 그저 젊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원들의 재기를 돕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가 운영했던 아발론과 51가 인근 콴스마켓은 폭동으로 잿더미로 변했다. 그는 마켓이 화염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해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불씨가 남아 있던 마켓 안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하와이안 가든에서 카슨 파이오니어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폭동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한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의 설명은 대다수 폭동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겪고 있는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희망’이란 단어를 잊고 살고 있다고 밝힌 그는 “폭동이 발생한지 15년이 지나도록 폭동 피해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한인사회가 따뜻한 마음으로 관심을 가져주었으며 좋겠다”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해광, 황동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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