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예선 작가
그 혈육상쟁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서울을 탈환한 후 국군과 UN군은 38도선 이남 지역을 회복한 후 10월 1일 북한으로 진격, 11일만에 평양에 입성한 국군 제 1사단은 미 제 1기병사단과 합류하여 평양의 인민군을 제압했다. 그때 김일성은 48년도에 체결한 조 중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중공군 참전 요청을 했고 모택동은 군 지휘관들에게 부대 편성을 명령했다. 10월말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에 밀린 국군과 UN군은 전쟁을 종결지으려 했으나 중공군의 제 2차 공세에 밀려 12월 4일에 평양을 빼앗겼다. 압록강에 태극기까지 꽂았던 아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금 38도선까지, 임진강까지 밀려 내려왔다. 결국 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 협상은 휴전선 문제와 포로교환 문제 등으로 18개월이나 늦추어졌다. 중국과 북한측은 제네바 협상에 따라 자동송환을 주장했고 미국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 개인의 자유의사대로 처리하자고 맞섰다. 그야말로 치열했던 치악산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리고 53년 7월 27일에야 휴전이 협정되었다.
“가방을 팽개치고 쌀자루를 머리에 얹혔다고 하지 않니? 동생까지 업고…”
“정말로 악바리다. 우리 같으면 그럴 수 없었을게다.”
“시체와 시체를 넘고 넘었다는데 나같으면 기절했을거다.”
“고목나무 뿌리로 몸을 덮을 생각은 어떻게 했지? 전쟁중에 생각은 더 잘 전투들을 했나보다. 아니, 전투들을 한게 아니고 생각들이 발레를 했나보다. 달과 별들이 위로하며 망또까지 보석으로 씌웠다고 하지 않니?”
백번이 넘는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고 나면 네명의 꼬마 친구들은 돌아가며 이렇게들 말했다.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금 돌아가며 이런 말들을 반복했다.
“그래도 신통해. 3개월간이나 지켜온 가방을 버리고 동생을 챙겼잖니.”
“가엽기도 해. 그 다리위에서 얼음 냉차 사라고 종일 소리를 질렀다니 그게 소리였겠니, 울음이었지.”
“전쟁이 끝나면 우리 모두 서울에 놀러가자. 그 염천교 다리에 가서 모찌좀 먹어보자. 그 순하고 착한 현성이가 왜 그토록 모찌타령을 했는지 맛이나 보자.”
“왜 하필이면 전쟁 직전에 서울로 이사가서 그런 고생을 했지? 혜성이가 그 전쟁터에서 죽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구, 생각만해도 따라 죽고 싶다.”
내가 서울로 떠난후 맥이 탁 풀려살던 친구들은 물 만난 고기들이 되어 무한천이 아닌, 서해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듯 활기에 넘쳤다. 전쟁을 일선에서 겪은 나는 철갑상어가 되어 캐스피해 등 더욱 세계를 향해 <벨루가 캐비아>를 체내에서 만들어 나아갔다.
학교에서도 월반아닌 월반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전쟁과 피난의 기간동안 학교를 못간 나를 초등학교 성적을 참작하여 그 공백을 묵인해 주었다. 전쟁은 계속중이었지만 우리들은 다시 합쳐 열심히 공부도 하고 열심히 놀면서 세계속의 꿈을 더욱 더 키워 나갔다. 운명이라 명명한 내 선언대로 우리의 운명에 순종을 했다. 이 <순종>이라는 단어는 내가 성경구절에서 따 온 것이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단다’, 교회는 나가지 않으면서 성경속의 아름다운 말과 필요한 말들을 적재적소에 잘도 인용했다. ‘산개가 죽은 사람보다 낫단다. 열심히 살자’, ‘범사에 감사해라’,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니? 범사에 감사해야지, 범사에 기뻐해라.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별들이 내려와 망또를 만들며 나를 감싸고 위로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냐. 절대로,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 기뻐해라. 슬플때 절대로 울지 말라. 기쁨의 눈물만 흘려라. 하도 어린날 외쳐댔더니 스스로 세뇌가 되어 나는 슬플때 눈물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눈물을 흘릴때는 아름다울때, 감사하고 감동 받았을 때다.
훗날 성인이 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경험하면서 나는 세뇌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들 옆에 있을때의 즐거움. 진정한 친구는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의 비극이 뉴스에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이렇게 아픔에 동정의 동참을 하게된다. 그러나 친구라고 하면서도 그 기쁨에 진실로 함께 하는자는 많지 않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머리속 가슴속으로는 부러움과 함께 시기와 질투까지 한다. 때문에 나의 사랑에 대한 감별법은 상대의 기쁨이 그대로 내 기쁨이 될때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 순간 나는 나의 기쁨 이상으로 행복하다. 이런 사랑의 대상이 북가주 도처에 있다는 것은 나의 행운이자 축복이다. 나는 기쁘고 고맙다. 이들의 존재가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내린 사랑의 정의, 행복의 정의이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사랑’이 무엇이냐, ‘행복’이란 어떤것이냐, 묻고 묻지만 나의 사랑관과 행복관은 ‘너와 그의 존재’이다. 너나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너와 그의 존재속에서만 나의 존재가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후에도 이어진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것은 불변이다. 어떠한 난관도 뚫고 지나간다. 흔히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 어떻고 슬퍼들 한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행복의 씨앗’이다. 이 행복의 씨앗으로 나는 가슴속에 울창한 ‘레드우드’ 숲을 가꾸고 싶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