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회>
“자, 그만 가자”
가족의 눈길이 젖은 채 서로와 서로에게 멈추었다가 타버린 집쪽으로 옮겨지기를 거듭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앞장을 서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묻지도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후 아버지는 대문이 확 열려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전소된 우리집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 언덕위의 집 같은 곳 대청마루엔 그 집의 가족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보니 주인남자는 낯이 익었다. 가끔씩 우리집에 들려 비밀통로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고 가던 부하직원이었다. 주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버지와 일찌기 무슨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간밤에 그 지역이 몽땅 폭격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새 걱정을 했지만 무사하신 것을 보았다는 소식도 인편에 들었습니다. 저의집이 폭격을 맞지 않았으니 이 곳에 마음놓고 계시면 됩니다.”
부인과 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겼다.
“수제비라도 드시고 쉬시는 것이 어떨까해서…”
주인이 말하자 부인과 딸 셋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비로서 인성이를 꼬마식모에게 넘겼다.
“그 아줌마도 살아계시겠지?”
현성이가 ‘누나’라고 부르며 울음을 터뜨린 후에 입을 연 첫마디였다.
“왜, 모찌 생각이 나서?”
현성이는 대답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아직은 너무 이르니까 이따가 염천교로 가보자.”
살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내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돈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현성이를 보는 순간 맨 먼저 떠오른 것은 모찌였다. 마음껏 사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모찌 아줌마는 살아계실거다. 그 집은 염천교 저쪽이니까 무사하실거다.”
염천교에 가보자는 것만으로 모찌는 누나가 사줄것이라고 알았는지 동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늘이 추석이잖니. 소공동에 가서 월병도 사줄께. 땅콩엿도 사주고 탕수육까지 사줄께. 우선 팻말을 만들어야해. 외삼촌이 왔다가 우리를 못 찾을테니까. 집터에 이 집 주소를 써서 꽂아 놓아야 하거든.”
나는 이제 전쟁은 끝났고 외삼촌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고 어머니에게는 가끔 약만 사다드리면 되었다. 약사러 가는 길에도 염천교를 가운데 한 국군과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건이야말로 단 한번으로 충분했다. 그 다리를 건너며 이쪽 저쪽을 지날때마다 양팔을 높이 들고 손뼉을 치면서 이유를 설명해야했던 전선. 아군과 적군의 경계선을 넘나들어야했던 그 밤의 악몽, 그 공포의 순간, 두번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뿌연 연기속에서 하루가 지났고 어둠은 오히려 고요를 깔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는 그 고요속에 나만 깨어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결코 다시 보여주지 않은 너무나 큰 달이 밝게 나와 함께 했다. 언덕위의 집 마당을 밝히며 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달은 서서히 물러가면서 더 많은 별을, 보석보다 더한 빛을 뿌려대는 별들을 보냈다. 뿌리고 뿌려, 망또같이 나를 두르며 위로해 주라고 달이 부탁한 듯 했다. 한달간의 냉차장사도, 두 주일의 참외장사도, 염천교에 국군이 입성하던 밤, 그 전선을 왕래해야 했던 것도, 내 가방이 집과 함께 사라진것도…, 다 꿈이다. 별들이 속삭였다. 쌀자루를 이고 동생을 등에 업고 뛰다가 뒤를 돌아 보았을때 소금 기둥이 되지 않았듯이 다, 꿈이다. 그래 꿈이다. 달도 별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일수가 없다. 바람이 차가웠다. 전쟁의 열기를 식히려는 것일까. 그 해의 추석 밤,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산 안셀모>에 거주하는 아름다운 부부, 내가 존경하는 의사와 시조시인 부부도 9.28 서울 탈환당시 폭격에 집이 전소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이야기를 했다. 바람이 유난히도 세차게 불었다고.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밤을 새웠다. 그 꼬마가.
전설의 고향같은 6.25이야기.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역사임을. 모찌를 사달라고 울던 동생, 누나손을 놓칠까봐 움켜줜채 눈을 맞으며 피난길을 동행했던 우리남매. 이제는 동생이 마음의 모찌를, 마음의 손을 내밀고 나를 지킨다. 우리 남매의 역사도 이렇게 흘러왔다. 같이한 시간만큼 그리움이 남는다했던가. ‘소중함이란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어린왕자의 깨달음. 있음 자체의 존중과 귀중함. 진정으로 행복이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 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동생에게, 북가주의 사랑하는 대가족에게 소중하고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6.25는 3년 1개월하고도 2일간의 전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백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고 30억 달러의 손실을 낸 전쟁이었다. 살아서 헤어진 가족들은 남과 북에서 하나씩 지상을 떠나고 기억속에서만 존재해가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가 맞물려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는데, 살아있는 남과 북의 가족들은 무엇에 귀착되어 있을까. 나의 전쟁 기억은 전설의 고향이 되어 그해의 보름달과 별들과 염천교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리고 나의 확신대로 고향으로 미리 내려가 있던 지성이까지 1.4 후퇴때 다시 만나 모두 생존했지만, 백만명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 남과 북의 가족들은 얼마나 서글픈 사연 속에서 아프게 살고들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북가주의 가족 가운데는 유복자로 태어난 사람이 둘이 있다. 단 한번도 말은 안했지만 그들을 볼때마다 얼굴에 그리움이 드리워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 그리움은 전설의 고향이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살아 있는한 사라지지 않을 그리움이다. 생존의 가망성은 세월과 함께 점점 멀어가고 어쩌면 끝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제대로 영위할 수가 없다.
죽음을 인정하고 우리는 다 죽는 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일때 우리의 삶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국가의 비극으로 강제로 헤어져야만 했던 관계, 당시의 사회상으로 인한 이념으로 갈라서야 했던 관계, 그것이 부모와 형제간의 관계였다면, 그 죽음의 철학은 색이 다를 것이다. 그리움이 전신을 옥죄고 있는데 여유있게 죽음을 의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코, 결코 전설의 고향으로만 매듭지을 수 없는 혈육상쟁의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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