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선 신작소설
지난 4월, 나는 월드컵을 앞둔 세계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는 나림 이병주 문학제 참석을 위해 조국의 남단에 있었다.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던 이병주.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젊은 지성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이병주. ‘인생이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 당대의 젊은 청춘들은 이병주와 함께 흘러갔다.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까지 허물며 냉정시대의 자유인이었던 그가, 지리산처럼 아직도 요동하지 않은 채 섬진강의 물결 위에서 빛나는 문학제. ‘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 그 청춘들이 백발이 되어 문학제에 모였다. 하동의 섬진강변 오룡정 ‘이병주 문학비’ 앞에서 치루어진 제 14주기 추모식. ‘이병주라는 고봉준령 앞에 진보와 보수, 이념과 사상을 넘어 문인, 정/재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이 포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너무도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의 삶, 역사인가 신화인가. 모두는 그와의 인연 속에 얽힌 그의 말과 글의 이삭으로 인해, 가슴과 머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추억들을 더듬으며 그 곳에 모였었다. 한 달에 원고지 1000장, 모두 10만장의 작품을 남기고 그가 떠난 지 14년. ‘이 거인의 빈자리 메울 자 있을 것인가’를 물으며 진행된 문학제. 지리산은 무겁게 침묵했고 섬진강은 도도히 흘렀다. 오직 전설같이 신화같이 피어있는 환상의 배 꽃 위로, 벗꽃들이 송이송이 흰 눈이 되어 우리들의 그리움인 듯 대지를 덮었다. 지리적 공간적 개념적인 것까지 망라한 이 문학제. 해외에서는 내가, 그 곳에 있었다. 백만 명이 넘을 그와의 직/간접 인연 가운데 50인 속의 발기인으로 내가 있었다. 그리고 하동 종합사회복지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추모행사장 단상에 내가 올려졌다.
“선생님, 보고 계세요. 소식을 접한 순간 1초의 망설임 없이 참석을 결정한 제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선생님을 사랑한 이 많은 사람들, 보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그리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장래는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밤 11시가 되어가는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등단한 나의 목메인 말에 장래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의 생전에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가졌다면 이 자리에 함께 계실 것을, 함께 행복해 하실 것을. 살아있는 자의 몫은 타계한 사랑하는 사람을 추모하는 것인가요. 이 것이 산 자들의 서글픈 특권입니까?”
불혹의 인연 따라 역사를 베개 삼아
사마천을 꿈꾸시던 ‘바람과 구름과 비’
한 겨레 얼룩진 갈피 고난 딛고 섬기셨네
“역사는 산맥이요 문학은 골짜기라”
세월에 묻혀버린 무지렁이 눈물 한숨
꽃마다 영혼을 찾아 쟁쟁하게 새기셨네
바람 가고 구름 가고 줄기찬 금수강산
올곧은 말씀으로 ‘지리산’ 물꼬 틔어
목마른 하동의 뜨락 이정표를 세우셨네
그 슬픈 시조 창으로부터 시작된 추모제. 앞 서 연단에 섰던 인물들의 ‘나림 이병주’ 회고 담으로, 연사나 청중이나 모두 살아있는 자의 서글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작은 붓대로 하나의 천재에의 꿈을 키워온 그에게 모자를 벗지 않을 수 없다. 이병주는 우리 문단 최후의 거인이다.’ 그 비루한 일상 속에 100여년의 한국 지식인 소설의 계보를 버무려 넣을 줄 알았던 그는 감히 단언하건데 천재이다. 그의 발상들이 항시 시대를 앞서가 그 열매를 다른 작가들에게 따게 해주었던 전력을 생각해보라. ‘지리산’의 열매를 ‘남부군’과 ‘태백산맥’이 따먹었듯이 ‘행복어 사전’의 열매를 우리 시대의 젊은 이야기꾼들이 은밀히 따먹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는가.’ ‘한국인에게 글 읽기의 즐거움 또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한 없이 공급해준 이병주.’ ‘이야기 문학으로의 이병주 문학.’ ‘이병주 문학에 주목합니다. 이병주 문학으로부터 우리는 한국문학의 새 길 찾기가 가능하지 않나 합니다. 이야기 또는 서사란 무릇 문학의 출발이자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걸출한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이병주 선생은 이미 이야기문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그러기에 더욱 문학적인 이병주의 이야기문학.’
그와 함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놓칠까봐 자리를 뜰 수 없었던 사람들. 그의 발자취를 놓치기 싫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한 연사는 말했다. 많은 오해가 난무했던, 명예회복이, 남은 우리의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임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학연이나 지연, 그리고 일부 부분적인 ‘태작’의 영향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가이다. 요컨대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서는 안 될 작가이며,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한 작가의 필생의 공력으로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올 곧게 수용해야 마땅한 한국 문학계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다시 이병주 선생인 것이다.’
어쨌거나 생전에도 인정 받은 행복한 작가가 사후에 ‘다시 이병주’라는 대명제하에 밤은 젊었다. 젊디 젊은 밤에 사랑을 담은 논리적인 회고담은 이어져 갔다. ‘여기서, 다시 이병주’라는 대명제를 내놓은 연사는 고인의 데뷰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여러 사람들의 예를 들기도 했다. ‘산뜻하면서도 품위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구조, 낯선 이국적 정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누구든 쉽사리 접근할 수 있도록 용해하는 힘, 부분부분의 단락들이 전체적인 얼개와 잘 조화되면서도 수미상관하게 정리되는 마무리 기법 등이 이 한 편의 소설에 편하게 채워져 있었으니’. 그는 ‘알렉산드리아’ 이후 천차만별의 창작 유형들을 남겨 놓았다. 연사는 강조했다. ‘작고 사소한 허물을 덮고 크고 유다른 성과를 올곧게 평가하는 대승적 시야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이병주인 것이다.’ 그는 니체의 말을 빌려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 고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도처에 미문, 관렴적 서술, 낭만적 발상과 박식이 담론상의 특징인 그는 ‘기록이 문학으로서 가능하자면 시심 또는 시정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스며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가능하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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