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홍 시인·자영업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조금은 어색한 듯 조금은 부끄러운 듯 그리고 조금은 더 당황스러운 듯이.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외상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길 건너 아파트에 오늘 입주했고 대각선으로 보이는 이층 창문이 그녀의 방이며 오늘 저녁 때 갚을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안 주는 외상이었지만 그녀의 간청이 너무 진지했고 또 달라고 하는 것이 계란 한 줄과 우유였으므로 나는 그만 처음 마켓을 찾아온 그녀에게 외상을 주었고 그렇게 해서 그녀는 첫날부터 나의 외상 단골손님이 되었다.
사는 것이 몹시 힘들어 보였다. 이십도 채 안된 나이에 남편도 없이 두 아이와 노모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외상으로 물건을 집어들 때도 몇 번이나 망설였고 더 싼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골 랐다.
주급을 받는 날이면 아이들과 함께 마켓으로 와 밀린 외상을 갚고 장을 보아갔다. 외상이 너무 밀릴 때면 겁먹은 듯 잔뜩 몸을 움츠리고는 다음 주급 일에 꼭 갚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앳된 얼굴이 상해 보였다. 그녀는 너무 일찍 가족부양의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삶의 밖으로 내몰린 것 같았다.
새해의 어느 날, 밤늦게 큰길을 가로질러온 그녀가 허겁지겁 외상을 달고 나갔다. 양손에 플래스틱 봉지를 무겁게 들고 주춤주춤 두리번거리며 생(生)을 건너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마켓에 오지 않았다. 마켓 문 닫을 시간쯤 밖에 나가 바라보면 그녀의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으나 밤낮으로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은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그녀가 아파트로 난 길을 따라 멀리 떨어진 마켓으로 가는 것을 보곤 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녀가 몹시 괘씸하고 화가 났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동정하기 시작했다. 단돈 21달러97센트 때문에 이쪽으로 길을 건너오고 싶어도 못 건너오는 저 단절감. 마켓 맞은편 길로만 다녀야 하는 보행의 서러움. 시원스레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저 답답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미안한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켓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가는 발걸음.
나는 그녀의 외상을 탕감해 주기로 했다. 그녀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더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길 건너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일은 내일은 하던 것이 훌쩍 한 달을 넘기고 말았다.
또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오후의 한가한 시간을 틈타 그녀의 이층방으로 올라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수다쟁이 베트리아가 나를 보더니 쫓아 올라와서는 마리아가 아파트 비를 못내 쫓겨났다고 떠들어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춰 서서는 내 마켓을 바라보았다. 지금 막 이 아파트에 입주한 그녀가 두 아이와 노모를 방에 남겨놓고 쭈뼛쭈뼛 나의 마켓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내려오며 다시 올려다본 방 앞에는 자물쇠 대신 그녀의 커다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