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지휘자들은 나름대로 특색이 있다. ‘오자와 사운드’는 없다고 말하는 세이지 오자와 같은 지휘자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특색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뉴욕 필에서 생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있는 로린 마젤의 경우 화려한 색채와 주관적인 해석으로 유명하다. 카라얀의 ‘절도있는 음’과는 또다른 ‘음의 재창조’라고나 할까, 너무 독창적이어서 단번에 마젤의 지휘를 구분해 낼수 있을 만큼 마젤만의 음의 독트린이 있다. 때문에 마젤의 지휘는 요즘 뉴욕에서 찬 •반 양론으로 갈리며, 사임 임박을 알리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물론 마젤은 지난 해에 2009년까지 계약을 연장, 나름대로 오케스트라내에서 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젤의 소리가 아직까지는 들어줄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마젤의 위치가 과거 오토 클렘펠러였다면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요즘처럼 민주적인 교향악단의 관점에서 클렘펠러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음악은 주관적인 해석이 지나치다 못해 템포의 측면에선 거의 들어줄 수준이 되지 못했다. 살인적으로 느린 템포는 오케스트라 단원은 물론 청중, 오페라 가수 할 것없이 참을 수 없는 고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클렘펠러 같은 대지휘자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은 없었다. 클렘펠러는 마음대로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었던, 지휘자 독재시대의 가장 배짱있는 지휘자 중의 한명이었다.
만약 인생에서 피할 수 없이, 남보다 가혹한 고난이 닥친다면 사람들은 두가지의 경우로 반응 할 수 있다. 먼저 자포자기다. 전생의 죄(?)를 인정하고 묵묵히 운명에 순종하며 인종해 나가는 숙명파다. 다른 하나는 운명이 자신에게 안겨준 고난의 무게 만큼이나 운명에게 되돌려 주는 반항파들다. 전자가 조금 비겁해보이고, 동정적일만큼 나약해 보인다면 후자는 용감해 보이지만 다분히 피곤해 보이는 비극파들이다. 운명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운명을 의식하는 것이고, 대항의 의지가 강할 수록 그 비극적 운명의 골은 깊어지고 어둡다. 대항하는 인격이든, 포기하는 인격이든 역경이 인생에게 돌려주는 비극의 색채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역경에 대항하고 이를 승리의 차원으로까지 이끄는 인격이 주는 교훈은 용기라는 단어이다. 용기의 덕목만큼 인생을 하나의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이끌어주는 것은 없다. 물론 삶속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란 용기의 덕목만으로는 결론지을 수 없는 보다 주관적이고, 심오한 자기 투쟁이긴 하지만 적어도 용기있는 인격이 일류에게 던져주는 광채는 어둠을 쫓아내는 힘, 하나의 커다란 횃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토 클렘펠러(獨, 1885-1973)라는 지휘자는 카라얀이나 조지 셸, 혹은 번스타인이나 로린 마젤 같은 지휘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의 무거운 짐을 이겨내고 음악사에 빛을 남긴 지휘자였다. 물론 클렘펠러의 음악은 너무 개성이 강하여 과연 음악인지 아니면 클렘펠러만의 음의 독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만큼 주관성의 논란을 낳기는 했지만 클렘펠러의 지휘세계를 돌아보는 것은 위대한 작곡자들의 음악세계를 돌아보는 것 못지 않게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클렘펠러의 레코드를 처음 들은 것은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를 통해서였다. 첫 느낌이 우선 상식선에서 도저히 들어줄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뇌리에 스파크는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초라해 보였다. 클렘펠러가 느린 템포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언제가 음악잡지에서 백모 교수의 기고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클렘펠러의 지휘를 음악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클렘펠러는 교향곡 30분짜리를 거의 35분까지 걸릴만큼 살인적인 슬로우 템포로 연주한다. 템포가 생명이라고 할 수있는 음악에서 템포를 임의대로 조절하는 것은 연주가로서 생명을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나 클렘펠러의 반항(지휘)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클렘펠러는 1885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다. 어머니 때문에 어릴때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클렘펠러는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음악이론등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가의 길로 들어설수 있었다.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작곡, 지휘를 배우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클렘펠러는 1905년경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면서 지휘자로서의 전환점을 맞게된다.
같은 유태인이었던 말러는 전도 유망해 보이는 청년 클렘펠러를 프라하의 도이치 오페라극장에 추천했고, 취직에 성공한 뒤 클렘펠러는 말러의 추천서를 평생 신주단지 모시듯 간직했다고 한다. 개성이 강하고, 비타협적인 클렘펠러는 프라하에서 3년을 못채우고 쫓겨나지만 이후 바르멘, 쾰른,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을 거치면서 능력있는 지휘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1935년 나치와의 마찰로 미국 망명길에 오른 클렘펠러는 1939년 뇌종양이 발병하면서 길고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걷게 된다. 이후 반신마비, 다리 골절을 당한 뒤 딸 로테가 벌어들인 돈으로 근근히 연명해 가던 클렘펠러는 종전과 함께 다시 지휘계에 복귀하지만 51년 몬트리올 공항 트랩에서 굴러떨어져 허리 골절, 58년에는 파이프를 물고 잠자다가 전신 화상을 입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클렘펠러는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휠체어에 의지 지휘계에 복귀했고, 61년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지만 어느때부턴가 갑자기 지휘봉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육체의 고난이 지휘봉을 빠른 속도로 휘두를 수 없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새로운 예술의 눈이 떠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음악에서의 즐거움, 관능적인 템포는 자취도 없이 살아졌다. 오직 무겁고, 투명한 이성적 선률만이 표면 아래 출렁이는 모습으로 재 창조되기 시작됐다. 덕분에 클렘펠러의 독특한 지휘 스타일이 다시 음악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제 2의 명성을 얻게됐지만 아무도 클렘펠러를 모방하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무도 모방할 수도 없었다. 클렘펠러만이 창조할 수 있는 음악, 클렘펠러에게는 그만의 세계가 있었다. 마치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만의 음악이라는 듯, 육중하고 거만스럽게 견고한 속도, 자신만의 색채를 유지해 나갔는데 그 무게와 충실감은 아무도 견줄 수 없었다. 20세기 지휘자중 가장 독특했던 오토 클렘펠러는 52년 돈지오바니 지휘중 g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단원들은 마치 클렘펠러가 무덤에서 살아난 듯 소름이 오싹끼쳤다고 하는데, 운명의 신은 어쩐지 그에게 음악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음악은 그에게 죽음을 부수는 힘, 마술피리였다.
클렘펠러는 73년 수면중에 고요히 잠들었는데 그의 나이 88세였다. 죽음의 신은 그가 잠든 뒤에나 길고도 고난스러운 그의 수명을 종식시킬수 있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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