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전자제품들은 자꾸만 작아지는데
테크놀로지 발달과 함께 많은 전자제품들이 소형화됐다. 집채만하던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얇은 책만한 랩탑이 됐고, 벽돌만 하던 휴대 전화와 디지털 카메라는 크레딧 카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유독 텔리비전에서만은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형화와 소형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거실 벽 한면을 꽉 채울 정도로 큰 것들과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것들이 함께 사람들의 지갑을 열고 있는 것이다.
옛날 광고 내용 같지 않게 요즘 초대형, 초소형 TV는 마치 전혀 다른 기계 같아 보인다.
각기 다른 장점지녀
시청체험·기능 ‘딴판’
전혀다른 매체 착각도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중간 크기다. 의사 사무실이나 침실에 가장 많이 설치된 것은 20인치짜리로 보는 각도에 따라 틀리긴 하겠지만 화질도 아주 좋다. 그러나 한때 돈이 아주 많은 부자, 또는 영화나 TV 업계 간부들이나 가질 수 있었던 대형 TV 가격이 내려도 크게 내려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장만할 수 있게 됐는데 바로 그 사람들이 캔디바만한 크기의 텔리비전 또한 사들이고 있다. 새로 나온 ‘애플 아이파드’는 텔리비전 쇼를 볼 수도 있으며, 주요 셀폰회사들은 저마다 셀폰으로 생방송이건 녹화건 텔리비전을 볼 수 있도록 기능을 확대시키고 있다. 소비자들에게 몇년전 셀폰에 추가된 카메라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 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이 두가지 장치를 그냥 텔리비전이라고 부르기는 뭔가 적절치 않다. 큰 것은 홈 DVD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지난 주에 놓쳤던 연속극을 보는 홈 시어터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작은 것은 전화기, 뮤직 플레이어, 하드 드라이브와 카메라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크기가 너무 다르다보니 시청 체험 또한 너무 틀려서 마치 별도의 매체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대로 몇년 지나면 초대형과 초소형 텔리비전은 조상은 같지만 닮은 데가 거의 없는 먼 친척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휴대용 텔리비전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 화면을 눈을 찌푸려가며 볼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말한다. 사실 이제까지 개발된 휴대용 텔리비전들은 1960년에 나온 ‘모토롤라 애스트로넛’부터 1982년에 나온 ‘소니 워치맨’까지 모두 실패작이었다. 오늘날도 미국내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중 셀폰으로 텔리비전을 보는 사람은 150만명 정도로 전체의 1%도 안된다.
그렇지만 ‘젯블루’ 비행기에서 볼 수 있는 ‘디렉TV’의 36개 채널이나 오래 전에 방송된 ‘심슨스’를 랩탑으로 다시 보는등 텔리비전 시청자들은 이동 시청 경험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아울러 ‘아이파드’나 셀폰을 통해서도 시청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제 작은 텔리비전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이 휴대용 TV들은 기존 텔리비전의 정해진 시청공간, 정해진 시청 시간의 틀을 벗어나게 해준다. 영화건 드라마건 게임이건 30분, 혹은 1시간 단위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TV가 놓인 공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출근 길 기차 안이나, 커피샵에서 주문하느라 줄 서 있는 동안, 아니면 화장실에서 시간 나는대로 짬짬이 볼 수 있는 것이 이 소형 스크린 TV인 것이다.
따라서 소형 TV에는 나름대로 출퇴근 시간, 점심시간, 틴에이저들이 학교 문을 나서는 오후 등 작은 프라임 타임이 있다. 또 그 형태에 맞춰 정규 TV 방송 시간이 축약되기도 한다. ‘팍스’와 ‘MTV’등 몇개 방송은 회당 몇분에 불과한 ‘모비소드’라는 이름의 오리지널 연속극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셀폰 사용자들이 주문하는 텔리비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고TV’는 ‘위기의 주부들’ ‘알리아스’ 같은 인기 프로그램을 4분짜리로 편집해 내놓는다.
텔리비전이 소형 스크린에 맞춰 적응을 할지, 아니면 스크린 크기에 맞춰 서로 다른 형태와 장르로 분화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것은 2인치 스크린으로 봐도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지만 스포츠 게임의 경우, 단연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수퍼보울 같은 큰 게임 직전에 대형 TV가 갑자기 많이 팔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울러 PBS의 다큐멘터리나 시시콜콜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시간짜리 드라마등 길고, 복잡해 집중해서 봐야하는 프로그램들은 대형 화면으로 봐야 제격이다.
예를 들어 영화와 맞먹는 예산과 인력을 가지고 제작되는 텔리비전 쇼 ‘로스트’는 출연 인물도 많고, 촬영지의 배경도 훌륭하고 고난도 액션 장면도 많은데다 간간이 드러나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시각적 실마리등은 대형 화면으로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최근 뗏목 조각에 의지해있던 출연자 2명이 상어의 기습을 받는 장면을 HDTV로 본 사람들은 상어의 몸에 대기업의 로고가 문신되어 있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섬의 희한한 생태계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실마리였는데 같은 장면을 ‘아이파드’로 봤다면 아무리 화면이 선명하더라도 결코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뉴스도 마찬가지로 폭발 사건 현장 같은 보도는 시청자들이 몸서리를 칠 정도로 실감난다.
어쨌거나 초대형, 초소형 텔리비전들은 공동시청이라는 TV의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 과거 칼러 텔리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 먼저 장만한 집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같이 봤던 것처럼 대형 TV 주인들은 자랑을 겸해 친구와 이웃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시청할 기회를 만들고 있다. 또 갑자기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초소형 TV 역시 주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대형, 고화질 TV는 보기 좋고, 한 사람의 시계 전체를 끌어 들여 화면상의 이미지에 빠뜨려 버리는 힘이 있어서인지 채널이 자주 바뀌지 않는 경향이다. 반면 소형 TV는 하도 작다보니 손가락을 콘트롤에서 뗄 수가 없어서인지 계속 채널이 바뀐다. 그러다보면 마치 리모트 콘트롤을 시청하는 것 같다고 사용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김은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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