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도(오른쪽)씨가 동료와 함께 ‘마이웨이’를 연주하며 실력을 가다듬고 있다.
밤무대서 내 음악하니 ‘행복’
영화같은 인생
세상에는 영화 같은 극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한인들이 많다. 보통사람들이 선망하는 또는 상상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늘 속에 가려져 모진 삶을 힘겹게 이어가는 슬픈 인생도 있다.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그러나 우리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 한인들을 ‘영화같은 인생’이란 주제로 연재한다.
무교동·청량리 등 방방곡곡 누비다
80년대 중반 스탠드바 붐에 밀려나
94년 이민… 타운서 ‘밴드 선생님’삶
무교동 세시봉, 청량리 맘모스, 부산 코모도스.
중학교 때 처음 잡은 기타를 30여년 동안 단 하루도 놓아본 적이 없는 김영도(48)씨. 지금도 매일 밤 LA 한인타운 내 한 룸살롱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삶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하는 진정한 음악인이다.
일찌기 기타 실력을 인정받아 방송국 악단장이던 삼촌 덕분에 고교 때부터 무교동 세시봉 무대에 설 수 있었고, 방송국에도 취직했다. 그는 “고향 친구들과 사당패라는 밴드를 구성해 82년부터 청량리 맘모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전성기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80년대 중반 스탠드바 붐이 일면서 1인밴드와 B밴드(기타+건반)가 정통밴드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후 기타 하나 둘러매고 전국 방방곡곡의 나이트 클럽을 돌아다니는데 지친 그는 1994년 재즈를 배우겠다며 미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공주의 한 나이트 클럽 개업식 날 겪은 나체 연주 사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도 나오는 장면이다. 그 지역 건달의 압력을 받은 영업부장이 옷을 벗고 연주하지 않으면 우리 업소 망한다고 사정하는 바람에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밤무대 밴드라는 불확실한 직업 때문에 31세 때 만난 첫 사랑과 헤어진 뒤 혼기를 놓친 김씨는 지금도 기타와 앰프를 애인 삼고, 음악을 친구 삼아 한결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미국에 온 뒤에는 한국보다 차별이 적어서 좋았는데 얼마 전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음악에 심취해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귓 볼에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술 취한 남자 손님이었다. 몸까지 밀착시키는 그 손님에게 “왜 그러시냐”고 웃으며 말했지만, 눈가에는 핑 도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김씨는 음악인들은 어떤 무대에 서던 “나의 음악을 보여준다는 자부심에 연주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임순례 감독의 2001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는 남성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본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밤무대 사회자는 이들을 ‘밤무대의 비틀스’로 선전하지만 사실은 가라오케에 밀려 지방 도시를 전전하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인생들이다.
음악에 인생을 걸었지만 별 볼일 없어진 이들의 인생. 연극판 출신 배우들의 깊고 자연스런 연기에 관객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슬픈 삶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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