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범<문학박사>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 또 음력 사월 초파일인 부처님이 오신 날이 있게 마련인 5월이면 생각나는 고전이 있다. 바로 유교적 효 사상과 윤회와 환생이라는 불교의 설화적 요소가 가미된 심청전이다. 심청전의 줄거리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은유(隱喩; metaphor)를 재음미 해보면 그 속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 교훈이 담겨 있다.
먼저 주인공인 심청과 아버지의 심봉사의 성씨(姓氏)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심청(沈淸)과 심봉사는 성(姓)이 심(沈)씨이다. 그런데 이 성씨를 나타내는 심(沈)자는 마음 심(心)자와 같은 소리이다. 그래서 심청은 ‘마음이 맑은 이(心淸)’이고, 심봉사는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 바로 ‘心봉사’의 은유이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印堂水)도 황해바다 어느 곳이 아니다. 인당(印堂)은 한의학에서 우리 얼굴의 두 눈 사이(양미간; 兩眉間)에 있는 혈자리를 나타내는데, 바로 부처님의 두 눈 사이 백호광(白虎光)이 나는 자리이다. 인도에서는 이 자리를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라고 하는데, 인체의 일곱 군데 차크라(생명력이 활동하는 중심부)가운데 하나로, 너와 나, 생(生)과 사(死)라는 이분법이 극복되어 온 우주가 하나가 되는 화합을 상징하는 자리이자, 진실과 절대적 깨달음을 투시할 수 있는 제3의 눈이다. 즉 인당수(印堂水)는 바로 자기를 버림으로써 남과 하나가 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맑은 심청’이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뛰어드는 곳은 바로 인당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 바로 거듭남(重生)이요, 환생(還生)이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거듭남의 새로운 삶은 없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은 가난한 시골의 눈먼 봉사 홀애비의 딸에서 일국의 가장 추앙받는 왕비로 거듭난다.
이기적인 욕망과 어리석음, 번뇌로 사로잡힌 자기를 버리기 이전의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를 버리고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거듭난 삶은 즐거운 복락을 누리는 새로운 삶이다. 그렇게 거듭난 사람은 부귀와 영광, 안락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누기 위해 아직까지 기득권과 욕망,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지혜의 눈을 뜨게 한다.
일국의 최고 여인을 상징하는 왕비로 거듭난 심청은 심봉사가 눈을 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잔치를 베푼다. 심청전의 백미이자 절정(climax)은 심청과 재회한 심봉사가 심청의 절규 속에서 눈을 뜨는 장면이다.
아이고! 아버지, 아직도 눈을 못 뜨셨소!
딸은 애간장이 탄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건만 아비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질 않는가. 아아, 어찌 아직 눈먼 채로 있단 말인가. 심청의 절규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아비의 어리석음에 대한 준엄한 호통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여 눈을 뜨게 해주게 하려고 하였거늘 어찌 아직 앞을 못보고 있단 말인가? 딸의 간장이 타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심봉사는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손으로는 딸의 얼굴을 더듬는다.
아버지라니...? 이건 내 딸 청의 목소리가 아닌가? 어디 보자! 내 딸 청아!
어디 보자!라니? 눈먼 봉사가 뭘 보겠다고 보자고 하는가? 어디 보자!하는 거기에는 어떤 인위적 노력도 생각도 없다. 눈이 있고 없다는 생각도, 다른 모든 생각도 잊은 채, 오직 어디 보자!는 순수한 본능적인 일념의 희구만이 있을 뿐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눈이 있는지 없는지도 잊어버리고 외치는 혼신의 한마디에 심봉사의 눈은 희번뜩 뜨인다. 어디 그 뿐인가. 심봉사가 눈을 뜨니 전국에서 모인 봉사들이 연달아 눈을 뜬다. 눈을 뜬다는 것은 무명(無明)과 무지(無智), 탐욕과 번뇌로 가려진 우리의 마음의 눈이 떠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를 던짐으로써, 또 다른 한 사람이 탐욕과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을 뜨고, 연이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이유, 자기를 던져 남을 공양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밝은 지혜의 눈을 뜨도록 하는 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