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재숙 칼럼
▶ 10년만에 방문한 한국 (2)
아버지: "멋진 연 날리기를 가르쳐 주마."
아들: "촌스럽게 연이라니요? 난 핸드폰으로 전화나 할래요."
10년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나는 걷기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한강 고수부지에 조성된 한강공원을 자주 찾았다. 이곳은 한강변 양쪽을 따라 잘 조경이 되고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는 좋은 곳이었다.
볕이 좋은 삼월 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걷고 있는데, 잔디밭에서 한 9-10살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연 날리기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구정이 지나간 지가 얼마 되지 않고 겨울 스포츠로 좋기 때문에 오랜만에 부자가 공원에 나와서 연을 날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들은 연을 처음 날려보는 모양으로, 아버지는 열심히 아들에게 연 날리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강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로는 어느 지점에서 끝나게 되어 있어서 나는 방향을 바꿔 산책로를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이 보기 좋은 부자의 연 날리기가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서너 번 아버지가 쥐어 준 연을 마지못해 날려보던 아들 녀석은 곧 싫증이 난 모양으로 더 계속하라는 아버지와 승강이를 벌이는 듯했다. 내가 다시 돌아서 걸어 그들 가까이 왔을 때는, 연은 아버지 차지가 되어 있었고 아들은 핸드폰에 대고 열심히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한국에선 ‘핸드폰’이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모든 전화기가 다 손으로 잡고 쓰는 전화기가 아닌가? 휴대, 이동, 또는 셀(셀룰라cellular의 준 말) 전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하 셀전화로 부른다.) 몇 번씩 그들 곁을 지나서 걸었건만 아들은 전화만 붙잡고 맹렬히(?) 입과 성대 운동만을 계속하고 있었고, 김 빠진 몸짓으로 아버지는 아직 연을 잡고 날리다 멈추다 하고 있었다.
몇 걸음 사이에 가까이 있는 아버지가 전화 저 편에 멀리 있는 아들의 친구보다 아들에게 한없이 더 먼 존재라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슬퍼졌다. 모처럼(특별한 이유로 일찍 퇴근을 했는지 모른다)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려던 아버지의 소망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연날리기 같은 고리타분하고 시시한 놀이보다 셀전화로 친구와 시시덕거리는 것이 아들에게는 훨씬 더 신바람 나는 소일거리임에 분명했다.
‘옛것’을 사랑하고 전수해주려는 아버지와 ‘새것’과 ‘테크놀로지’에 길들여진 아들의 세대차이가 보여주는 이 막막한 괴리감에 나는 우울해졌다. (그러나 이런 외양만으로 다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아버지는 평소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던 사람일 수도 있다. ‘하숙생 아빠’가 이 날 갑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와 연 날리기를 가르치려 했다면 아들이 시큰둥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아무튼 셀전화 얘기를 좀 더 해보자. 한국은 세계 제1의 셀전화 보유율을 자랑한다.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다수가 셀전화를 가졌으니, 셀룰라 관련 연구를 하려면 단연 한국에 와서 해야한다고 할 정도이다. 그 편리함과 (9.11, 대구 지하철 참사 등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위기 아래서의 위력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이번에 한국에서 ‘셀전화 중독증’ 또는 ‘셀전화 공해’라고 해야만 할 듯 싶은 사회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제 부모들이 자녀가 누구와 전화를 하는지 전혀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화기가 거실, 부엌 등 가족 공용 주거 공간에 있을 때와 달리, 이제 자녀들은 제 방에 틀어박혀서, 또 집밖에서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댄다. 부모의 자녀 통제력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셀전화를 가진 사람들은 별 필요가 없는데도 하루 종일 전화를 하는 것 같다.
실내에서만 주로 하던 전화가 길거리, 야외, 달리는 차 속 등 무제한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이번에 어느 친척 동생과 차를 타고 약 2시간을 가는 동안, 별 이유 없이 남편으로부터 셀전화가 4번이나 오는 것을 보았다. 이쯤 되면 셀전화 중독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셀전화에서 주고받는 문자 멧세지 때문에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어가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셀 문화권 용어 사전이 나와야 할 판이다. 대학가에서 창조되는 은어와는 또 달리, 최대한으로 자수를 줄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별 희한한 단어와 문장의 단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4u’는 ‘for you’의 뜻으로, ‘gtg’는 ‘got to go’의 뜻으로 쓰여진다. 구체적인 용어의 사례는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유형의 신조어가 속출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새 단어와 표현들은 이제 셀전화용만으로 쓰이지 않고, 셀 문화 밖으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어느 교수님을 만났더니, 대학생들이 이런 언어표현을 교수에게 하는 이메일에서도 쓰고 있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인터넷과 셀전화로 보낸 멧세지가 많은 청장년층 유권자들이 마지막 몇 시간 동안에 나가서 투표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말도 들린다. 노무현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치와 재계의 세대교차 현상과 더불어 인터넷과 셀전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 문화가 한국 사회에 앞으로 미칠 영향이 어떻게 펼쳐질지 지대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영향이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것이기를, 부정적인 면은 최소한의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애팔래치안대 정보기술 시스템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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