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땅 한 복판에 우뚝 솟아서 새롭게 피어나는 중앙이로세"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노랫말처럼 중앙국민학교(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는 시청을 마주보면서 포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수많은 초등학교가 동네마다 있지만 그때는 포항을 통틀어 다섯 개의 초등학교가 있었을 뿐인데 그 중에서 중앙국민학교가 당연히 가장 명문이었다. 포항시 초등학교들이 모여서 벌이는 야구대회나 핸드볼대회 등이 있을 때면 우리는 늘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 학교 선수들이 가장 뛰어났고 우리 학교 학생들의 입음 새가 가장 세련되었었다. 그 때마다 소리 높여 "포항 땅 한복판에"를 불러 젖혔다.
그런데 그 "포항 땅 한복판에" 자리잡은 모교가 폐교위기에 몰려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들이 줄어든 것이 이유란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는 포항제철이 들어선 북쪽으로 팽창해갔고 이어서 남쪽에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선 주거지역이 개발되었다. 그리고는 북쪽과 남쪽을 잇는 순환도로가 개통되면서 양쪽 지역은 계속 발전하는 대신 예전에는 가장 도심지였던 곳이 이젠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아파트가 없는 만큼 거주인구도 차츰 줄어들고 마침내 취학연령의 아동들이 없어서 학교조차 폐교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곳은 "포항 땅 한복판"이 아니었다.
지난주간에 한국을 방문해서 이 소식을 듣고 나서 마침 모교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폐교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그랬던지 참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다. 학교에 다닐 땐 그렇게 크고 아득해 보였던 운동장이 왜 그렇게 조그마하게 보이든지. 작금의 한국에는 두 가지가 유행하고 있었다. 전 국민을 허망한 열병에 들게 하는 로토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동창회란다.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녀들이 삼, 사십 년만에 만나서 이젠 남의 부인, 남의 남편된 동창생들을 보고 가물가물 기억 속의 이름들을 끄집어내어 거침없이 반말로 부르고 대답하는 이 모임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중앙국민학교 출신들만 모이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서 가끔씩은 음 보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해에 같은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인연으로 너무 편하게 반말이 나온다는 그 모임에 멀리 타지에 사는 동창들까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참석들 한다고 한다. 미국에 사는 관계로 한 번도 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는 나는 말로만 듣는 그 모임이 무척 궁금하고 그리웠다. 서로가 적당한 거리에서 반듯이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현재의 계급장을 벗어버리고 훌쩍 과거로 돌아가서 흉허물없이 부대낄 수 있는 수 있는 모임은 항상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일 것이다. 더군다나 로토가 그토록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사람들이 마음이 허망할 때라면 초등학교 동창회가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교가 폐교되어 없어진다면 동창회는 어떻게 될까? 내 생각에는 동창회의 결속력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 한다. 사라져 가는 것 혹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애착은 더욱 강한 연대감과 결속력으로 보상받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포항 땅 한 복판에" 있던 중앙국민학교가 없어진다는 소식은 어쩔 수 없는 상실감으로 나를 우울하게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잡지에 실린 소설가 최인호씨의 인터뷰기사를 읽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 "별들의 고향"을 스크랩해가면서 읽었고 안인숙이 주연한 영화 "별들의 고향"을 보고 나서 생맥주 잔을 기울이며 이장희의 노래 "한 잔의 추억"을 불렀던 우리 세대에게 최인호는 마치 초등학교처럼 또 다른 감성의 고향과 같은 존재이리라. 그런데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문단의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소설가로 데뷰한 이래 40년 이상 그는 줄 곧 치열하게 문필을 휘둘러왔다. `당신의 세대가 지나가고 있지 않는가’ 라는 의미로 던진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는 용문사의 은행나무이다. 그 나무가 놀라운 것은 그것이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라서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나무에 무슨 세대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며 그 증거로 무수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얼마 전 "상도"라는 소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했던 그는 과연 최근에도 장보고의 생애를 추적한 소설 "해신"을 출간함으로 계속되는 열매를 통하여 그 자신의 성장을 증거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소멸되어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들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성장하던 십대와 이십대를 훨씬 넘겨버리고 이제 사십의 후반에 접어든 나에게 시간의 흐름은 더 이상 만만한 것이 아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열심히 동창회 모임에 참석해서 향수를 달래고 연대감을 과시한다고 해서 `중앙국민학교’가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되어 간다면 그 초등학교가 지속적으로 존재한 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행히 은행나무가 세대와 관계없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 최인호가 그러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육체적 나이와 관계없이 계속 자라갈 수 있다는 것을 나도 확실히 믿는다. 그러나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성장할 것인가, 소멸할 것인가? "포항 땅 한 복판에 우뚝" 솟았던 모교가 폐교될 것이라는 소식은 나에게 큰 도전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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