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일반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서 얘기해 보려 한다.
고교 졸업반이던 우리 둘째에게 지난 4월에 예일대학에서 합격 통지가 왔다. 합격 가능성이 사실 높았는데도, 어쩐지 예일 같은 곳은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상관 없는 별세계로 은연중 생각해 왔는지, 뜻밖이라는 느낌이 먼저 왔다. 그 다음에는 기뻤다. “돈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은 축하하자!"면서 마침 집에 와 있던 아이와 축배를 했다. 그러자, 다른 여러 곳에도 합격했지만 아이는 이제 내게는 예일대학 밖에 갈 곳이 없다고 선언했다.
자고 일어나니, 돈 걱정을 해야하는 ‘그 내일’(來日)이었다. 1년에 거의 4만 달러! 미국에서 28년을 살아와 실용·실질주의가 몸에 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 곳 채플 힐의 주립대(상당히 좋은 학교이다)보다 비용이 4배가 드는데, 정말 4배나 더 가치가 높은 교육을 예일에서 한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부부는 늦게 둘째를 낳아서 몇 년 내 은퇴할 계획이었고, 둘 다 빚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마침 한국에서 교환 교수로 와 있는 친한 부부도 딸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에 다 원서를 냈으나 불합격했다고 알려 왔다. 우리가 아직 결정 못하고 있다고 하니까, “아니, 왜 그러세요? 우리 딸은 아빠가 집을 팔아서라도 돈은 마련 할 테니 원서 내라고 했는데요. 예일에 합격이 되었는데 무슨 생각하고 말고가 있어요?"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하여 상의하니, 모두 “빚을 좀 내면 어떠냐, 보내라!"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주변에 있는 미국인 친지들은 반응이 한결 달랐다. 내 바로 옆 오피스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는 첫 마디가 “너희 부부는 은퇴하긴 다 틀렸어!"였다. 또 다른 미국인 동료는 예일이라는 말을 듣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How much?"(돈 얼마나 드니?)라고 물었다. 또 한 미국인은 “네 집 형편에 맞는 학교를 가는 게 좋을 걸"이라며 최고 명문이 아닌 대학에 갔어도 충분히 잘 된 사람들의 예를 들기도 했다. 우리 동네의 한 할아버지는 큰 아이는 어디를 갔느냐고 물어서 주립대라고 하니까, 거기를 나왔어도 잘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아무튼 아이가 고집을 꺾지 않아서 아이의 선택에 맡기게 됐다. 부모가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는 간다며 아이는 제일 학비 융자 조건이 좋은 은행을 알아냈고, 마치 아이의 양부모처럼 행동해온 이웃 미국인 의사 부인은 빚 보증을 서기를 자청해 와서 우리를 깜짝 놀래킨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렸다가 평생 후회나 원망을 한다면 어쩌랴! 또 합격 통지를 받자 마자 아이가 한 말이 내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합격한 것은 형 덕택이예요.(I owe this success to Ben.) 우리 형편엔 맞지 않는다고, 처음엔 예일에 원서를 낼 생각도 못했죠. 그런데 형이 ‘넌 할 수 있어. 인생에서 교육이란 값을 매길 수 없도록 중요한 것이니까, 어떤 희생도 타협도 하지 말아’라고 했거든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밤잠을 못 자면서 곰곰 생각해 봤다. 큰 아이가 희생도 타협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이었을까. 자신은 희생이나 타협을 해서 후회한다는 얘기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유순한 아이라, 원서 내도 소용 없다, 우린 너 비싼 사립대는 못 보낸다는 말을 듣고 아예 원서도 내 보지 못했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사실 둘째보다 첫째가 공부를 훨씬 더 잘했었다. 그래서 큰 아이에게 전화해서 “네 동생의 대학 선택에 대해 너의 의견은 어떠냐?"하고 물어봤다. 금방 그 아이다운 대답이 나왔다. “그 결정은 어디까지나 동생이 하는 것이지요. 나는 동생의 결정을 100% 지지할 뿐입니다." 그 대답으로 모든 것은 결말을 내리게 됐다.
<세상 일은 참 요지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아이는 실질적이고 또 남들 말대로 ‘효자’라서, 전액 장학금이 나온 주립대를 선택했던 것이고, 둘째는 양보 안 하는 성격과 주립대에서 장학금을 따내지 못한 것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해서 아이비리그 대학을 간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누가 더 성공을 할 지(그런 잣대가 가능하다면), 과연 엄청나게 비싼 아이비리그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이름 값이나 허영심 충족에 불과한 것인지.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때 그 때마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결정이 난 지금,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걱정이 있다. 혹시 아이가 엘리트 의식을 가질까 하는 것이다. ‘엘리트’란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지, 본인이 자처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타이른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라."
/애팔라치안대 정보기술 시스템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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