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국의 한 문학지에 재미있는 글이 하나 실렸다.
중견 시인인 강인한씨가 월간 ‘현대시’에 ‘명시(名詩) 속의 옥(玉)에 티-올바른 시어의 선택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유명한 시(詩)가 신성 불가침의 옹호를 받는 일은 재고돼야 한다. 좋지 않은 결점은 제대로 바로잡는 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윤동주 김소월 등의 시(詩)에 담긴 시어(詩語)의 결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라는 부분의 ‘죽어도’가 쌀 속의 뉘처럼 몹시 거슬린다고 말한 김종길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김소월이 ‘아무렇지 않게 되는대로’ 라는 뜻으로 즐겨 쓴 ‘허투로’를 사용해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허투로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끝을 맺었다면 ‘죽어도’의 서릿발 치는 느낌이 곱게 가셔지면서 시(詩)의 여성적 분위기를 일관되게 살려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명시(名詩)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배제해야 하며, 시(詩)의 어법도 합리적 상식과 바른 문장 표현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말은, 우리들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갑고 재미있는 일이다. 또한 글을 쓴다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는 더욱 신성한 충격이었으며, 시작(詩作)을 하는 데 있어서 또 한층 새로운 시각을 갖는 기회가 되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우리들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아 가슴 깊이 저려오는 아름다운 그 존재 하나로 명시(名詩)는 이미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왔다.
형이상학, 형이하학을 떠나 명시(名詩) 속에 ‘옥(玉)의 티’가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있는 그대로 가슴에 담아왔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즐겨왔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안 모인다.’ 그렇다. 너무나 깨끗한 것만을, 너무나 완벽한 것만을 찾는다면 거기에는 같이 놀아 줄 그 무엇도 없게 된다.
오히려 명시(名詩) 속에 그런 ‘티’가 있었기에 그것들이 더욱 ‘옥(玉)’으로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런 ‘옥(玉)의 티’가 있었기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건 모르고 있었건 그것들에게 더욱 쉽게 접근하고 더 빨리 사랑하게되고 더욱 가까이 지니고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억측이라도 부려보고 싶다.
20세기를 넘어 꿈의 21세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 획일화되어있고 너무 완벽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情)이 메말라 간다는 말을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을 듣는다. 이는 결국 최고, 일등, 완벽 만 추구하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이미 자취를 감추어 버린 우리들의 ‘옥(玉)의 티’를 찾아야 할 시점이 왔다는 어떤 계시(啓示)는 아닐까. 이제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옥(玉)의 티’를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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