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구 <조지워싱턴대 객원교수, 경기대 교수>
수운은 <논학문>에서 "내가 동(東)에서 나서 동에서 도(道)를 받았으니 학(學)과는 다르다"고 했다. ‘도’는 보편적이다. 어디서나 도는 같다. 그러나 도를 표현하는 ‘학’은 같을 수가 없다. 그것은 도를 하는 사람의 풍토, 지리 그리고 피와 살을 떠나 ‘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학의 특수성을 강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수운의 주장은 오늘 날 이 땅에서 학문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수운의 자기문화중심사상은 결코 타문화에 대한 배타주의가 아니며, 도리어 타자언급을 위한 전제로서 자문화중심주의이다. 그는 동학을 말하지만 그의 사상속에는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기독교의 사상마저 수용하여 통전적(通全的) 철학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통전철학사상이 한반도의 이념적 대결구도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수운에게는 서학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흠모하는 소위 ‘정다산 콤플렉스’같은 서학관은 발견하기 힘들다. 처음부터 수운은 서학을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 위력 그 자체가 바로 천주를 믿는 데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라의 위기가 바로 하느님을 잊어버린 데 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그가 서학을 비판하는 배경에는 바로 존재인 천주(天主)가 존재자체인 지기(至氣)를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운의 지기란 바로 이러한 문명사적 또는 종교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19세기말 조선시대의 정신적 풍토에서 나타난다. 천주로는 존재의 과부하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과부하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지는 오늘날의 기독교 즉 서교가 저지르는 병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 정체성에 빠져버리는 위기를 늘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존재가 쉽게 이원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존재자체는 늘 수운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불연기연(不然其然)으로 불확실하고 유동적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존재자체는 ‘생성’과 일치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반대의 일치를 말한 다음 "만물은 유전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周)의 ‘역(易)’을 ‘변한다’고 풀이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결국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생성과 변화로 보는 철학, ‘창조성’을 존재자체로 보고 그리고 존재자체를 수용하는 철학은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으로 서양에서는 이단시되었다.
수운이 지기(至氣)를 ‘허령창창(虛靈蒼蒼)’이라고 한 것은 존재자체에 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몫을 지켜 존재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막기 위한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동양의 사상가들도 모두 존재가 치러야 할 몫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투어 무(無)와 허(虛)와 공(空)을 말하고 있다.
이돈화는 지기(至氣)를 무한 소(小)와 무한대(大)의 양극을 지닌 것 또는 정신과 물질의 양극을 지닌 ‘물건’이라고 했다. 정신 또는 물질을 하나의 극으로 표현할 때 존재는 항상 정체성이 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극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결국 존재는 해체되고 말며 존재자체가 거론된다. 오늘 날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의 해체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자체’가 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과 동양사상이 대화할 수 있는 물줄기가 여기서 열리게 된다. 데리다는 ‘차연(差然)’이라는 양면성 또는 양극성의 개념으로 존재나 이성을 해체하려고 한다. 이런 기본 구도로 볼 때 성리학(性理學)이 존재인 인격신을 배제시켰으나 신의 위상만은 남겨놓은 이유를 알게 된다. 즉 무극은 ‘지기’ 또는 ‘창조성’과 일치하고, 태극은 ‘천주’ 그리고 ‘신’의 자리와 위상이 같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성리학의 ‘이(理)’가 기(氣)의 ‘생명’과 ‘운동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사회가 정체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다산은 서학을 수용함으로써 무기력할 대로 정체된 당시의 정신세계를 활성화시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수운은 서교의 신관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다. 그러면서 기철학의 기를 수용하고 반면에 인격신은 전래의 무층적(巫層的) 전통에서 찾아 양자를 결합하여 ‘지기’와 ‘천주’를 조화시켜 놓는다. 이는 실로 기철학과 서교를 절묘하게 통일하여 예술적 종합을 이룩한 것이라 할 수1 있다. 그리고 동학은 반(反)서학적, 원시적, 민족의 고유 무층(巫層)과 선층(仙層)속에서 사상을 발굴해냈기 때문에 민중혁명의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제 문명은 동학을 비롯해서 도(道), 불(佛), 유(儒)등 동양철학(사상)에서 출발, 21세기를 시작으로 새 천년을 열어갈 것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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