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설경구(33)를 보면 `박하사탕’ 의 끔찍한 영호가 떠오른다. 영호는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나 돌아갈래” 라고 절규하던 주인공이다. 그는 “벌써 잊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모습에서 현대사에 의해 처절하게 파괴된 한 인간의 잔해를 본다.
그리고는 애써 찾으려 한다. `단적비연수’ (감독 박제현)에서 적으로 비(최진실)를 소유하기 위해 부족을 배반하고 미친듯이 날 뛸 때의 설경구는 영호의 어느 시절과 닮았을까.
`단적비연수’ 촬영 때 소리만 조금 질러도 제작진은 영호를 연상했다.강한 연기이지만 분명히 다른데도. 영호가 나약함에서 오는 절망적 자기파괴라면, 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어쩌랴. 독기를 뿜는 그의 눈빛에서, 매몰찬 그의 대사에서 고문하던 영호, 자전거를 타고 식당으로 돌진하던 영화를 떠올린다.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그런 반응은 한동안 갈 것이다. 7번이나 상을 받을 정도로 영호라는 깊은 이미지를 남긴 배우의 운명이다.
한동안 그것이 좋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이 우울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일부러 피하지 말자. 내 안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연기를 하더라도 20년 세월의 영호의 한 부분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무시하고 가자. 애써 벗어나려고 하면 오히려 과장된 연기가 나올 수 있다. ”
배우로서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순종하지만 영화 `단적비연수’ 에서 적은 운명을 단호히 거부한다. 부족과 친구 단(김석훈), 연인 연(김윤진)을 배반한다. 설경구는 그것을 `사랑’ 이라고 했다. 단의 이성적인 사랑과는 색깔이 다른 단만이 갖고있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사랑이다.
그때부터 그도, 영화도 팽팽해 진다. 적의 영화가 된다. “감정을 쌓아 어느 순간 폭발시키기 위해 말하지 말자. 드러내지 말고 무표정하자. 그런 다음 내 사랑은 이런 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배역도 유리했다. `쉬리’ 에서 한석규 보다 최민식이 더 부각되듯 단보다는 열등의식, 상실감에 사로잡힌 적이 훨씬 강렬하다. 적을 설경구에게 맡긴 것도 영호에서 느꼈던 그런 강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이란 인물이 이해는 됐지만 동화하기가 힘들었다. 상황과 목표만 보고 미친듯이 달렸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배경에 빠져 들었다.”
설경구의 연기는 이런 식이다. `박하사탕’ 에서 배운 것이다. 물고문 장면을 적당히 보려줄 수 없어 그는 감독이 `그만’ 이란 신호를 배내고도 다섯을 더 센 후에야 청년의 머리를 욕조에서 꺼냈다. `단적비연수’를 선택한 것은 오락영화, 화려한 포장의 블록버스터도 해보고 싶어서 였다. 확실히 상업영화는 컷(Cut) 부담이 많다. 그래서 호흡을 매끄럽게 연결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강한 역할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섬세함이 필요해 어렵지만 일상적 연기가 좋다. 주위에서 보고 찾을 수 있어 편하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인물은 겁난다. `단적비연수’ 에서도 적보다 단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전도연과 함께 지극히 일상적인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를 찍고 있다.
그는 내년에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 다시 출연한다. 끔찍하지만 배우로서 발가벗기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옛날 가죽점퍼를 그대로 입고 다닌다.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 결과는 `안된다’라고 나와 있지만 그 꿈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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