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니 색이 풍성하다. 파란 하늘은 더 파랗고, 은행잎은 노랗게 색을 더하고, 단풍잎은 붉게 물든다. 좀처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색들이 모여 자연 속에서는 아름답게 빛난다. 무더위를 견뎌 낸 다음이라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은 담장 밖으로 보랏빛 등나무 꽃이 늘어진 집을 지나, 반들거리는 초록색 잎 속에 희디흰 매그놀리아 꽃이 피어있는 길모퉁이 집을 돌아서면 공원 잔디밭이 펼쳐진다. 봄, 여름에는 주로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멀리 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눈이 즐거워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여름내 꽃을 보며 걷다가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비탈진 오른쪽 길을 택한다. 그 길은 꽃도 있지만, 가을이 오면 꽃보다 더 선명한 단풍길이 된다. 한낮의 햇살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바람이 얼마나 차가워졌는지, 계절의 색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느낄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 은행나무나 설악산 붉은 단풍처럼 수려하거나 풍성하지는 않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소박하게 줄지어 있다. 하지만 색으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은 화려한 길이다.
오랜만에 언덕길을 따라 산책했다. 서둘러 붉게 물든 잎도 있고 아직 초록을 띠고 있는 잎도 있었다. 단풍나무는 제법 물들어 붉은빛과 주황색이 뒤섞여 있었다. 은행잎은 아직 여름이 남아 초록이 조금씩 노랑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일주일쯤 지나면 더 선명한 색으로 물들 것 같다.
꽃도 없는 단풍나무는 지난 계절 내내 초록 덩어리로 보였다. 물을 올리고, 가지를 키우고, 잎을 만들며, 생명을 이어갔을 부지런함이 어쩌다 한 번씩 지나는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꽃에 눈이 멀고 향기에 취해서 잎사귀 따위에는 눈길조차 건네지 않던 사이, 푸르던 잎은 어느새 붉고 노랗게 물들었다. 제법 서늘해진 아침, 마침내 숨겨 놓았던 색을 내놓으며 가을의 주인공이 된다.
순식간에 화려함을 뽐내고 사그라지는 꽃이나 때를 기다려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이나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새삼 깨달으며 걸었다. 여린 싹을 틔우고 강한 햇빛을 견디느라 애썼구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구나, 묵묵히 견디며 기다리니 예쁜 색으로 물들었구나.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긋나는 것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할지, 놓아야 할지 갈등할 때도 있었다. 머물러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소망을 잊은 적도 있었다. 혼란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단풍잎을 보며 기다림의 시간과 변화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때가 되면 핏빛보다 더 붉은색을 내는 단풍잎이 된다.
가을이 달아나고 있다. 유독 이 가을에 마음이 머무는 까닭은 내 삶 또한 화양연화 같은 시절을 지나 어느새 가을의 한 자락에 와 있는 탓일 게다. 지나보니 헛된 시간이란 없었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도 내 삶을 더 가치 있게 물들이기 위한 밑거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꽃이 져 아쉬웠던 마음을 거두니 단풍이 더 고운 빛으로 물든다. 그 잎이 떨어진다 해도 괜찮다.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는 삶의 의지를 정직한 자태로 드러내 보여줄 테니까.
심심하고 느리게 가는 지금의 일상이 열정으로 들끓던 청춘의 밤들보다 못하지 않다. 꽃은 꽃이어서 좋고, 단풍은 단풍이어서 좋다.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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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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