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 고교동창생이 뜬금없이 “미국에 이민 가고 싶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친구도 나처럼 신문기자가 천직이었다. 대충 감을 잡았다. 비상계엄을 객기 부리듯 선포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잡다한 범죄혐의로 기소돼 재판받던 야당대표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판을 개탄하는 게시글들이 동기동창 단톡방을 달궜다.
팔순을 훌쩍 넘긴 친구의 미국이민 타령은 미국에서 40여 성상을 보낸 내가 한국 역이민 을 뇌까리는 것만큼이나 실없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이민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다. 노인이 많고 거의가 부자들이다. 꼭 정치상황 때문만도 아니다. 요즘 미국 정치는 한국보다 썩 낫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재판받는 피의자 신분에서 당선됐다.
지난주 본국지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백만장자 2,400여명이 올해 해외로 이주할 전망이다. 글로벌 투자이민 자문사 ‘헨리&파트너스’의 2025년 연례보고서는 이들과 함께 국내자산 152억달러(20조6,000억원)가 해외에 유출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의 투자이민 전문 송지현 한인변호사는 올해 상담건수가 작년보다 3배가량 늘어났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겪은 한국의 백만장자 유출이 올해 인도(3,500명)에 이어 세계 4위에 오를 것으로 분석했다. 비상계엄 사태, 대통령 탄핵선고, 조기 대선으로 줄달음친 정국 불안정과 사회갈등을 지적한 듯하다. 그러나 자녀교육과 세금감축(특히 상속세), 해외투자 확대 등 경제적 동기를 더 큰 요인으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지난해 상속세를 대폭 인상한 영국은 예상 유출 백만장자가 1만6,500명으로 만년 1위였던 중국(7,800명)을 제쳤다. 한국의 상속세는 OECD 38개 회원국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을뿐더러 전체 중소기업인의 37%가 60세 이상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사업체 승계를 고민하다가 결국 상속세가 낮은 외국으로의 투자이민을 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애틀의 모 신문사 지사가 오래 전에 본국 투자이민자에게 팔렸다. 하루아침에 대 신문사의 오너 지사장이 된 투자자는 라이벌 신문의 고용 지사장이었던 나를 찾아와 “진짜 목적은 자녀교육이고 신문은 전혀 모른다”며 경쟁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아이비리그에 합격해 이민 목적을 이뤘지만 신문사는 얼마 안 가서 문을 닫았다.
투자이민자들이 늘어나듯 역이민 하는 한인들도 늘어난다. 작년 10월 LA타임스 특집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소셜시큐리티를 받은 한인이 2013년 3,709명에서 2023년 9,379명으로 10년간 2.5배 늘어났다. 현재 한국거주 미국시민권자 한인은 4만7,406명이다. 2023년 한국국적을 회복한 교민 4,203명 중 60% 이상이 미주 한인인 것으로 집계됐다.
타임스는 전남 고창의 한 은퇴자 마을 800여 주민 중 3분의1이 역이민 한인이라고 소개했다. 본국의 콘도 광고가 한인 미디어에 곧잘 게재되고 분양설명회도 열린다. 수십년간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온 지인 두 명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자녀들을 만나러 종종 나오겠다고 했다. 영구 귀국자들의 소통창구인 ‘역이민 카페’도 있다고 귀띔했다.
동창친구는 역이민을 꿈도 꾸지 말라지만 여생을 안전하고, 살기 편하고, 의료보험 좋은 고국에서 보내는 꿈을 꾸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노인이 많다. 아니,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탄압정책이 아니꼬워 젊은 한인들까지 역이민을 꿈꾸게 될지 모른다. 이들은 나도 말리고 싶다. 역이민은 만사형통이 아니다. 얼마 못 가서 역역이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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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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