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한인 125년 (31) 워싱턴에 주미 한국대사관 개설
입력일자: 2009-06-08 (월)  
뉴욕한인 125년 31. 워싱턴에 주미 한국대사관 개설

1948년 12월12일 파리 유엔총회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될 당시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장면이 49년 1월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 장대사는 워싱턴에 부임하면서 구매담당 참사관 김세선, 1등 서기관 한표욱과 셋이서 대사관을 창설했다. 이때 이승만의 친구인 스태거스 변호사가 워싱턴DC N.W. 5스트릿 자기소유의 컬럼비아 빌딩 1층을 제공해 공관이 마련됐다. 장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것은 49년 5월25일. 엉성하나마 대사관 업무가 시작됐는데 이때가 한민족의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 침탈된후 실로 44년만의 일이었다.

이대통령은 주미대사관 설립을 지시하면서 초기 활동 지침을 내렸다. 1.정보수집에 치중할것 2.한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사실과 남한의 인구가 전체의 3분의 2라는 점을 주재국 정부와 국민에게 꾸준히 주지시킬것 3.남북통일에 대비해 국회의석 1백석을 비워놓고 있음을 통보할것 4.우리는 평화통일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할것 5.경제원조와 무기원조가 절실함을 설득하고 다액의 원조를 얻어낼것 등이었다. 특히 무기원조가 급선무여서 장대사와 한표욱은 당시 애치슨 국무장관, 딘 러스크 차관보, 존 윌리엄즈, 나일즈 본드등 국무성 관계자들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49년 4월 조병옥 특사가 워싱턴에 오면서 한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초계정 10척과 하버드 T6라는 훈련기도 구입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국내로 부터 정일권과 손원일이 달려왔다.

한미군사원조협정은 국내치안 유지와 38선 경계선상의 충돌방지, 북한군의 무력공격및 기타 침랙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장비제공을 위해 체결된것. 그러다가 애치슨 국무장관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발언이 나오자 곧 한국전이 발발했다. 대사관은 6.25동란중 유엔과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대해 참사관으로 분주했던 김세선은 장면 대사가 천주교인이라는 점이 여러가지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풀이했다. 미국 정부에는 천주교인인 아일리쉬들이 많았는데 우선 경제원조를 엄청나게 받아야할 한국으로서는 그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인물로서 장대사가 임명되어 제대로 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했다.


김세선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 유학올때 월남 이상재의 소개로 이승만을 하와이서 만난적이 있었다.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밟다가 비지니스에 입문했던 그는 해방직전 미국무성 산하 검열국에서 일본문서를 번역 분석하는 작업을 하다가 워싱턴에서 이박사를 다시 만나 그의 귀국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으로 부터 날아온 소식은 워싱턴 대사관 설치 준비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참사관으로서 초창기 할일은 많고 본국 정부에서 보내주는 경비가 모자라 궁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미국인 비서로는 캐톨릭 유니버시티 총장 여비서 아그네스 데이비스를 채용하고 때마침 박사과정을 밟던 한표육이 합류하면서 네식구가 되었다. 원면과 곡물 수입에 정신없던 그에게 본국으로 부터 해군함정 1척을 사 보내라면서 1만8천불이 송금돼 왔다. 당시 그액수로는 자동차 몇대 살수있는 정도였는데 미상무성을 움직여 롱아일렌드 해양대학에서 공매로 내놓은 순양함 한척에 매달렸다.

미국정부의 도움으로 결국 1만7천651달러 매입하는데 성공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당시 연간 약 6천만달러 상당의 원조물자를 혼자서 처리했던 그는 대사관 설치 초기 한국서 필요한 각종 기계류, 원료들을 사보내는 일이 중요했다면서 해방후 원면이 부족한 때여서 미국정부의 원조액으로 원면을 현지서 구입, 매달 화물선 두척씩을 세내어 실어 보냈다고 했다. 또한 잉여물자의 하나였던 양곡 수송량도 엄청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필자는 지난 86년9월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살던 그를 어렵게 찾아내 전화로 인터뷰 했었다. 4년후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학술회의에서 UC버클리대학의 인종학과 교수로 있던 그의 딸 일레인을 우연히 만났을때 그사이 부친이 타계한 소식을 들었다.

대사관 최초의 1등서기관 한표욱은 1941년 시라큐스대를 거쳐 하버드 대학원 석사, 미시간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중 이승만에 의해 발탁된 초기 외교관이었다. 외교의 ABC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 뭘 하려해도 선례가 없고 스태프도 없고 전용 텔렉스 마저 없어 본국 정부와의 통신은 일반 전보로 암호를 사용했다. 당시 NWA기의 서울 취항과 함께 외교파우치(행낭)를 이용했다. 전보를 챙기고 푸는데 시간이 걸렸고 일의 성격에 따라 국무성 사람들을 만나거나 미의원들을 방문했다. 또 뉴욕타임즈, 헤럴드 트리뷴, 워싱턴 포스트, 이
브닝 스타등 유력지 10여종을 읽고 분석하고 한국관계 기사가 나면 본국에 정보보고서를 쓰는 일도 일과였다. 이따금 미국 언론인들과 접촉해 한국정부의 입장과 정치상황을 설명하는 일도 있었고 거의 매일 열리다시피 하는 외교가의 파티에도 참석하는등 팔방미인처럼 활약했다. 1년쯤 후 3명의 직원이 충원됐는데 최운상, 오일육(오세창씨의 막내아들)이 3등 서기관으로 왔고 이성범이 구매관으로 부임했다. 49년 여름애는 이박사로 부터 10만달러 수준의 공관 건물을 물색하라는 지시에 따라 외국공관이 운집해 있는 매서추세츠 애비뉴 23스트릿, 셰리단 서클 3층 건물을 매입하게 됐다.


초대 주미대사 시절의 장면

1919년 YMCA 영어학교를 나와 미국유학 길에 오른 장면은 1925년 맨하탄 캐톨릭대 졸업과 함께 귀국해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활약하면서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신생정부의 파리 제3차 유엔 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해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한후 귀국하자 초대 주미대사로 발령이 났다. 워싱턴에 홀로 도착한 장대사는 워드먼 파크의 호텔에 방 하나를 얻어 숙소로 시용하다가 몇
달후 가족과 결합하면서 승용차도 마련했다. 이때 운전자는 위키라는 흑인이었는데 성실했기 때문에 4년후 그가 심장마비로 죽자 대사관에서 그의 조카를 후임으로 고용했다는 후문이다.

1951년 국무총리(대통령제 하)로 승진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1956년에는 민주당적으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4.19후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했으나 집권후 국민들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던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한 가운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총리 9개월만에 실각한 셈인데 당시 그가 몸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대처했더라면 쿠데타를 진압할수 있었을 것이란 가정과 함께 그야말로 민주적이고 영국신사 다운 풍모를 지녔었다는게 그에대한 평가다. 뉴저지 시튼홀대 박사학위를 받았고 66년 6월4일 타계했다.
조중무<언론인,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주미대사로 백악관을 방문한 장면 대사. 앉은 이가 트루먼 대통령. 그 왼쪽에 서있는 장면. 맨 오른쪽은 김세선 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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