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입국 부모에게서 출생… 시라큐스서 국제정치학 석사
▶ 현 상황은 정치인 책임… 얻은 만큼 커뮤니티 위해 봉사”
미셸 칸도스와 그녀의 가족이 시라큐스 대학 졸업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앵커 베이비’인 그녀는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셸 칸도스
■ ‘앵커 베이비’ 미셸 칸토스의 삶과 꿈
미셸 칸토스(24·사진)는 미국 태생의 시민권자다. 시라큐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녀의 꿈은 브루클린 지역에 자신의 비즈니스를 설립하는 것이다. 돈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꿈을 향한 그녀의 여정은 이미 시작됐다. 칸토스는 뉴욕의 비영리재단인 ‘퓨처 리더스 파운데이션’의 프로그램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지역사회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 육성을 목표로 하는 이 재단은 빈민 이민가정 출신으로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우수 학생들에게 3년간 펠로우십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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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미국에서 이른바 ‘앵커 베이비’로 태어났다. 칸토스의 아버지 훌리오는 1987년 에콰도르 안데스산맥 인근의 오지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 물론 밀입국이었다. 홀리오가 단신으로 먼저 왔고 수개월 후에 아내인 안나가 뒤를 따랐다.
미국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밀입국 길잡이인 ‘코요테’의 안내를 받아 육로를 통해 몇 개국을 경유하는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
둘은 각기 동일한 루트를 택했다. 일단 파나마로 날아간 뒤 거기서 코스타리카 국경을 넘었다. 이어 도보와 밴, 승용차 등을 번갈아 이용하며 니카라과와 온두라스를 거쳐 멕시코에 도착했다.
파나마에서 멕시코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악몽보다 끔찍한 일을 수도 없이 당했다. 코요테에게 그들을 인간 짐짝에 불과했다.
조그만 승용차나 밴에 봉지감자처럼 포개진 채 몇 시간이고 버텨야 했다. 훌리오와 같은 밴에 탔던 몇 명은 멕시코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 안에서 질식사했다.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코요테는 당연한 권리처럼 여성 여행자의 몸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죽음의 여행길’에서 코요테의 눈밖에 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딸이 차 밖으로 끌려나갈 때마다 남편과 아비는 짐짓 모른 척 외면했다. 그 모두가 집을 떠날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칸토스는 “아빠도 엄마도 ‘죽음의 여행’에서 그들이 겪은 참담한 경험을 얘기하지 않으려 들었고, 내가 말을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털어놓았다.
말할 수 없이 호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칸토스의 부모는 시차를 두고 무사히 뉴욕에 도착했다.
브루클린에 정착한 후 수년간 닥치는 대로 잡역부 일을 하던 훌리오는 택시 운전사로 취직하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시련의 끝은 아니었다.
1990년 칸토스가 태어난 후에도 고난은 계속됐다. 그들이 살던 아파트 빌딩 옆방에서 불이나 전체 건물이 전소된 통에 며칠간 노숙생활을 하던 칸토스 일가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의 공공 주택단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배정 받았다.
이 과정에서 체류신분이 노출되자 훌리오는 당시 여섯 살이었던 딸 칸토스와 두 돌을 갓 넘긴 아들 호세를 안나와 함께 에콰도르로 돌려보냈다. 체류신분 노출로 ‘앵커 베이비’인 두 자녀를 비롯한 일가족 전부가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칸토스와 호세는 이후 6년간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다.
그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미셸은 6학년이었고 영어를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다.
당연히 그녀는 이중언어반에 배정됐다. 하지만 말이 좋아 이중언어일 뿐 교실에서는 온통 스패니시만 사용됐다. 25명의 이중언어반 학생들은 모두 중남미 국가 출신이었는데 나이 차이가 나는 여러 학년의 아이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칸토스는 영어반 학생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그러나 칸토스를 불법체류자로 생각하는 카운슬러들은 그녀를 받아줄 ‘안전한 공립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칼리피 페어를 방문한 미셸은 그곳에서 포드햄, 뉴욕 주립대학과 시라쿠제 유니버시티에 지원서를 냈다.
시라큐스에 진학한 그녀는 택시기사인 아버지의 도움과 재정지원으로 대학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남동생 역시 플로리다 데이턴 소재 엠브리-리들 항공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칸토스는 대학재학 중 매년 여름방학을 마드리드와 제네바 등지에서 보냈다. 국제정치학 석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에도 칠레의 산티아고를 방문했고, 유엔의 인턴자격으로 태국으로 날아가 그곳의 정부 실무자들이 지뢰사용 금지규정을 시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칸토스는 해외여행을 유난히 즐기는 이유를 “미국인이라는 내 정체성을 강화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칸토스의 부모도 지금은 어엿한 귀화시민이다. 그들은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이 집요하게 제안하는 반이민 정책에 진절머리를 낸다.
행여나 미국 시민권자로 태어난 두 자녀의 장래가 불법체류자였던 자신들의 과거로 상처를 입지나 않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불법체류자 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차별과 수모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토스는 “왜 많은 사람들이 이민자들을 백안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이 어느 날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버려 수입이 끊기면 누눈가 책임을 질 사람을 찾게 되고, 자연스레 이민자들이 표적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녀는 되물었다.
칸토스는 “나도 미국시민의 한 사람으로 동료 미국인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이민자가 아니라 정치인들”이라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무책임하게 반이민 정서를 선동하는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칸토스는 “앵커 베이비라 조롱받는 나는 미국에서 얻은 모든 것을 커뮤니티에 돌리려한다”며 “정치인들이 그들의 선거구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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