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이민선조 숨결 남아 있는 리버사이드】
<하> 남가주 지역 애국·독립운동
조국 광복을 위한 노력과 삶의 발자취를 따라 300만 한인 동포들의 현주소와 미래를 찾아가는 대장정 ‘땀과 열정의 현장을 가다: 한인 디아스포라를 찾아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국광복 얼이 깃든 리버사이드에 이어 1910년대 이후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이 태동하던 초기 LA 한인사회의 흔적과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의 오렌지 농장 노동자들이 주를 이뤘던 남가주 한인사회에서는 한일 병탄의 비운을 겪어야 했던 191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이 태동한다. 리버사이드와 인근 지역에 머물던 한인들의 활동무대가 당시 급격한 경제적 성장기를 맞았던 LA와 인근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특히 도산 일가가 LA로 이주하면서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도 LA지역으로 서서히 옮겨가 1930년대가 되면 LA가 미 전국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또 산발적이었던 여러 한인단체들이 연합해 최초의 미 전국적인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돼 민족단체들이 하나로 결집하기 시작한다.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국망의 비극을 맞아 새로운 변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1910년대 이후 LA 한인 선조들의 눈물어린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제2의 임시정부, 대한인국민회
1909년 2월1일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 단체들이 최초의 미 전국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조국광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본격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한다.
대한인국민회의 결성 역시 도산 선생이 구심점이 됐다. 1900년대 이민초기 리버사이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면 생활개선과 민족운동에 열정을 쏟았던 도산 선생은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창설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는 최초의 미 전국적인 한인 연대조직이자 미국 한인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당시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도산 선생이 1903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상항친목회’에서 출발한 ‘공립협회’가 연합해 창설된 것으로 패사디나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대동보국회와도 연합하며 확대 발전된다.
1910년 2월10일 패사디나에서 시작한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통합된뒤 대한인국민회는 1911년 지방회만도 116개 결성할 정도로 세계적인 연합체로 발전하게 된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국인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최초의 세계적인 한인 조직이 되었던 셈이다.
대한인국민회는 당시 미국에 한인들에게는 임시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3년 대한인국민회는 당시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을 설득해 일본의 간섭을 배제시키고, 재미한인의 문제는 대한인국민회와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사실상 자치권에 준하는 권한을 인정받아 미국 속의 ‘임시정부’ 역할을 하게된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 동포들에게 자치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정치적 기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는 1912년 중앙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했으나 도산 선생이 한국에서 투옥중이던 1936년 본부를 LA로 이전했고, 1938년 4월17일 현재의 USC 캠퍼스 인근 제퍼슨가 북미 대한인국민회관을 건립하게 된다. 이곳이 현재 LA 한인타운 인근의 대한인국민회기념관 자리이다.
그러나 1921년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해 동지회를 설립한 후 안창호가 속해 있는 대한인국민회와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2년 4월 이후 국민회는 이승만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던 시기이다.
■국민회 남가주 거점, 클레어몬트 한인학생 양성소
리버사이드를 거점으로 한 도산의 초기 민족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리버사이드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클레어몬트 한인학생 양성소(215 N. Berkeley Ave. Claremont)이다.
당시 대한인국민회의는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있어 대한인국민회 지원으로 설립된 클레어몬트 한인학생 양성소는 1917년까지 대한인국민회의 남가주 거점 역할을 했다.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으로 1911년 10월14일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포모나 대학, 하비머드 대학 등이 있는 클레어몬트 대학촌에 한인학생 양성소가 2층 건물로 건립됐다. 이곳은 한인 학생을 가르치며 미래의 민족지도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올림픽의 영웅 새미 리 박사의 부친 이순기씨. 장리욱 전 서울대 총장, 곽림대, 강영대, 임정구 등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많은 학생들의 기숙사로도 사용됐고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학교도 겸했다. 당시 9개월 간의 기숙사비는 70달러였다. 도산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을 방문해 인재양성을 강조했다. 이곳은 현재 클레어몬트 소방서가 들어서 있다.
■ 도산 주도 흥사단 ‘민족운동 인재양성’ 메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성격을 띠는 단체였다면 도산이 창립을 주도한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헌신할 인재의 양성과 훈련을 위한 수양단체의 성격이 짙었다.
도산이 흥사단 창립 결심을 하게 된 것은 1907년부터 1910년 4월까지 한국에 머물다 제2 망명길에 올라 도덕적 품성을 갖추고 윤리적으로 건전한 공동체 생활을 해야 독립운동과 이상적인 사회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됐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은 LA와 샌프란시스코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해 1913년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마침내 흥사단을 창단한다.
초기 흥사단소와 안창호의 옛집터는 1915년부터 1932년까지 안창호가 세내어 살던 벙커힐의 2층 목조건물로 1932년까지 흥사단소로도 사용되었다. 이 집은 디즈니콘서트홀에서 서쪽으로 1블락 떨어진 곳으로 현재의 LA 수도전력국 주차장 자리에 있었다. 이후에는 USC 인근(3421 S. Catarina St)로 이전했다. 이곳의 흥사단소는 안창호 가족뿐만 아니라 송종익, 장리욱 등 단우들도 함께 지냈다.
흥사단은 8도 대표가 동등한 발기인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지역 차별과 편견을 타파해야 민족의 힘을 하나로 뭉칠 수 있다고 믿었던 도산의 신념 때문이었다.
흥사단은 창립 이후 빠른 속도로 조직이 확산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흥사단의 조직은 LA, 다뉴버, 로간,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퍼져 나갔고. 단우의 수는 1920년까지 약 150명으로 늘어났다.
■LA 한인사회의 태동
리버사이드에 파차파 캠프가 형성되던 무렵 LA에는 유학생들이 모인 한인 교회가 생겨나면서 한인사회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LA 한인사회가 밑그림을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도산 일가의 LA 이주였다. 당시 LA에는 30여명의 유학생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4년 안창호 가족이 리버사이드에서 벙커힐 지역으로 이사한 뒤 흥사단 본부 단소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전해 1930년대 초 USC 캠퍼스 부근의 제퍼슨과 카탈리나 거리로 옮길 때까지 한인들이 이 지역에 몰려 살고 있었다. LA 지역의 한인 주거중심이 벙커힐 지역이었던 셈이다.
LA 지역에서 두 번째 한인교회가 세워진 곳도 벙커힐 지역이었다.
1906년 5월 나성 한인장로교회가 이 지역에 들어섰다. ‘한인장로교 미션’이 그 출발이었다.
벙커힐은 1870년대와 80년에 의사, 변호사, 사업가들이 거주하는 주택지역으로 개발됐으나 1890년대 들어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해 1900년에는 현재의 3가 터널에 건설됐고, 1920년대 이르러 빈곤층 노동자와 연금 생활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변했다.
1910년을 전후해 LA 지역에는 나성한인장로교회에 20여명, 나성한인감리교회에 15명, 패사디나 호텔에 10여명, 그리고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에 16명 등 약 6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무렵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에는 200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고, 성인들은 오렌지 농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 대륙에 건너와 살고 있던 한인을 약 1,000명 정도로 추산한다면서 약 25%가 LA와 리버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남가주 지역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LA 한인사회의 성장: 1920~30년대
LA로 한인들이 몰리면서 미 본토 한인사회의 중심 지역으로 LA가 부상하게 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본토에 몇몇 한인 집중 거주지가 늘어났고, 한인들은 경제가 급성장하던 LA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1930년대 당시 하와이에는 약 6,500명, 미국 본토에는 약 2,500여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1930년 말 LA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900여명이었다. 한인들이 LA로 이주한 것은 자녀 교육도 큰 요인이었다. 공립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많아 자녀 교육을 걱정하는 한인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한인 유학생들도 대거 LA로 몰리기 시작했다. 1922년과 1926년 미 전국 한인 유학생 단체인 ‘북미한인유학생연맹’이 LA에서 열렸다.
1922년에는 한인 2세 조직인 ‘2.8클럽’이, 1924년에는 LA 한인교민단이 결성되는 등 LA가 미 서부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미주한인이민사를 작성한 고 이선주목사의 기록에 따르면, LA 한인들은1924년 한국의 수해피해 소식을 접하고, 당시로는 거금인 1,400달러를 모금해 보내기도 했다.
■2차대전 격랑 속 피어나는 독립의지
1940년대를 맞이하면서 LA 한인사회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939년 9월 시작된 2차 대전이 확전되면서 전쟁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 이은 태평양 전쟁 발발로 항일투쟁을 강화하려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 움직임도 강화됐다.
1940년 5월에는 LA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총회장 김호) 주도로 하와이에서 연합준비 모임을 거쳐 이듬해 4월 미주동포 보호와 미국의 대일전쟁 지원을 목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됐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당시 LA에서는 한인과 중국인들 중심으로 일본에 대한 고철 수출을 반대하는 항의시위가 롱비치항에서 연일 계속됐다. 미국 정부에 일본에 고철 수출을 중지하라는 한인과 중국인들의 항의시위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됐다.
또, 1939년에는 한인 어린이들까지 나서 일본 영사관 앞에서 연일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미 정부는 2차 대전 발발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무기와 철강, 고철 수출을 중단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인 12월22일 LA에서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도로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소속의 한인 경비대가 창설돼 한인 109명이 참여했다. 한인 군대가 미군과 함께 대일 전쟁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한인경비대는 1942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맹호군’으로 인준을 받았다.
같은 해 4월26일 LA에서는 미정부와 육군 고위층이 참가한 성대한 맹호군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LA 다운타운 퍼싱스퀘어에서 맹호군은 호랑이 머리를 수놓은 군기와 태극기를 앞장 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 300여명의 한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태극기를 흔들며 눈물을 훔치는 한인 동포들도 적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지 3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장엄한 행사였다고 한인이민사는 기록하고 있다.
1942년 8월29일에는 LA에서 한인사회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합병한 국치일인 이날 LA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다. LA 시 정부는 LA 시청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을 거행했다. LA시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행사로 풀이할 수 있을 만큼 뜻 깊은 행사였다.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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