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차파 캠프’ 사라졌어도 독립 열망 남아…
【제1편 이민선조 숨결 남아 있는 리버사이드】
<상> 최초의 한인타운 조성과 활동상
113년의 미주 한인 이민사의 출발인 첫 이민 선조들의 하와이 정착과 함께 미 본토에서도 한인 이민사회가 태동한다. 그 중심지는 바로 남가주의 리버사이드였다. 하와이 여러 섬의 30여개 사탕수수 농장에 정착한 한인 노동자들이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던 1903년과 1904년 무렵 미 서부지역의 부유한 농장 도시였던 리버사이드에는 미국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건너 온 이강, 정재관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온 장경 등으로부터 일손이 매우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한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4년 3월 말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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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만민공동회의 개혁계몽 명연설로 이미 민족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던 도산 선생이 미국 망명 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것은 리버사이드에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도산 선생은 대륙에 흩어져 살던 동포들은 물론 하와이에서 떼를 지어 건너오던 동포들에게 일터를 소개하는 한편 계몽교육과 애국강연 등으로 동포들을 결집시키며 이곳 파차파 캠프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게 된다. 그 결과 1910년까지 약 200여명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다.
당시 리버사이드는 오렌지 농사로 급속도의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있어 미 전국에서 농장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도산 선생이 최고의 지도자로 한인사회를 이끌었던 이곳은 ‘안도산 공화국’(Ahn Dosan’s Republic)으로 불린 미국 대륙 최초의 한인타운으로 1937년까지 존속하며 한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미국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
리버사이드로 몰려든 한인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주거를 걱정했던 도산 선생은 2.96에이커의 땅에 한인회관과 17동의 주거시설을 갖춘 타운을 형성하게 되는 데 그곳이 당시 ‘안도산공화국’으로 불리던 미국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1532 Pachappa Ave. 현 4430 Commerce St.)였다.
도산은 이 곳에 ‘한인 노동국’으로 불리던 한인 직업소개소를 개설한 뒤 모여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공동생활터로 2층짜리 회관 한 채와 방갈로 단층주택 16채를 지어 철저한 공동 자치생활을 훈련시켰고, 국운이 쇠해가던 조국을 걱정하며 한인들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해 나갔다.
그 중심인 ‘한인 장로회 전도소’와 ‘한인회관’이 들어서 파차파 캠프는 한인 공동체의 요새이자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 파차파 캠프에는 2층으로 된 중심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한인노동국 간판을 단 한인 직업소개소를 비롯해 예배처, 한국어 교실, 강당, 그리고 한창호 가족의 거실로 사용되었고, 전화도 2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름철에는 한글교실을 개설해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주일학교도 운영했다. 또, 이 건물에서는 예배 외에도 애국 강연이 자주 열렸고, 결혼식과 생일 축하연도 열리는 등 그야말로 한인 커뮤니티 공동생활의 센터 역할을 했다.
■최고 지도자 안창호
리버사이드의 한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도산 안창호였다.
그는 이 곳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협동생활과 국권 회복운동을 이끌었다. 깨끗하고 규울적인 집단생활을 통해 개인의 인격향상은 물론 미국 사회 안에서의 한민족의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동포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면서 민주주의 생활방식으로 구국운동을 조직화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파차파 캠프의 이 전도소에는 상임 목회자가 없었는데 도산은 신앙생활의 자치와 자립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파차파 캠프에서는 긴 담뱃대를 물고 외출하거나 파자마만 입고 집 밖에 나가는 한인들이 많았다, 도산은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에게 생활규칙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긴 담뱃대를 물고 외출하지 않도록 했고, 파자마만 입고 집 밖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했다.
또 오렌지 농장에서는 오렌지를 따는 한인 노동자들이 정성껏 오렌지를 따 농장주들의 신뢰를 얻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홍명기 밝은미래재단 이사장은 “당시 한인 노동자들은 오렌지를 가치 채 따는 경우가 많아 농장주들이 불만이 많았고, 이 때문에 일본계 노동자들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는데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성심성의껏 따도록 가르친 지도자가 바로 도산 선생”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도산 선생은 한인들에게 “미국인의 과수원에서 과일 한 개를 성실하게 따는 일이 나라를 위한 봉사하는 일의 한부분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철학을 노동생활 속에서도 철저히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
한인 노동자와 가족들 200여명이 그곳에 모여 낮에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했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배우고 일주일에 두 번씩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미 서부지역 한인들을 연결하는 한인공립협회가 이때 결성되었다.
이곳의 한인들은 안창호가 1904년 설립한 한인장로교 전도소를 교회삼아 다니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초기 한인 기독교인들인 미국교회에도 출석하였다.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100년사에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이 교회에 출석하는 한인 청년들이 있었고, 교인으로 등록한 한인들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이 교회당에서 일주일에 3일 저녁 영어를 배웠고, 한인전도소에서는 일요일 오후 2시와 목요일 밤 8시에 예배를 드렸다.
어릴 때 가족을 따라 하와이에 이민 온 뒤 다시 리버사이드에서 자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 외교위원은 회고록에서 리버사이드의 집단생활은 온통 기독교 교육과 정치운동이었으며,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에는 외세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공동체의 단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연설이 집회 때마다 계속되었다고 회고했다.
■도산, 직업소개소를 차리다
도산 선생은 당시 한인들에게 입바른 소리와 훈계만을 일삼던 고리타분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던 한인들을 위해 천리길을 마다않고 동분서주하며 최선을 다해 일자리를 찾아주었고, 이를 위해 한인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도산은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동포들에게 오렌지 농장을 비롯해 콩 농장과 철도 부설 공사장 등 일꾼을 찾는 곳이면 어디에나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는 스스로 중국인 농장이나 사업소를 찾아가 한인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니까 써달라고 부탁해 일터를 잡아주었다. 애리조나의 철도부설공사장과 유타와 와이오밍 공사장까지 찾아가 일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60여명으로 추산되는 한인 초기 이민노동자들은 일본계 고용대행업체의 눈치를 보면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직업소개소에서는 일본인만을 먼저 도왔기 때문에 한인들은 일자리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
도산은 오렌지 농장의 영농법을 배웠고 이를 한인노동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친 농업 지도자이기도 했다.
도산은 오렌지 열매의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과일의 부패를 막고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손톱자국도 조심하라고 동포 노동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틈만 나면 동료 노동자들에게 오렌지 과일의 수확이 높으면 개인들에게도 수입이 많아지고, 또 개인소득이 높아지면 생활도 향상될 뿐 아니라, 독립자금을 보태는 일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애국하는 길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농장주 럼지의 1,500달러
초기 한인사회의 거점이 됐던 파차파 캠프의 시작은 당시 오렌지 농장주 코르넬리우스 럼지(Cornelius Earle Rumsey)와 도산 선생의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 선생은 리버사이드에 미리 가 있던 이강과 정재관 그리고 임준기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한인을 위한 직업소개소를 차리게 되는데 이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미국인이 바로 농장주 코르넬리우스 럼지였다.
럼지는 당시 도산 선생과 한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오렌지 농장 ‘알타 크레스타 그로브’의 농장주 코르넬리우스 럼지였다. 당시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 노동자들이 일하던 ‘알타 크레스타 그로브’오렌지 농장의 소유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들을 위한 집단 거주지를 마련하고, 직업소개소를 차릴 종자돈이 필요했던 도산 선생은 농장주 럼지를 찾아가 한인 노동자들도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고용대행업체를 설립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한인노동자들이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찾아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부지런히 노력해 생산성을 높일 협동부락도 형성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위해 자신과 한인노동자를 믿고 1,500달러를 융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농장주 럼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는 동양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도산에게 1,500달러를 빌려주면서 매월 일정액을 갚도록 편리를 도모했다.
또, 도산의 열정과 성실성에 감복해 도산이 설립한 한인직업소개소를 통해 한인 노동자들을 자신의 농장에 전원 고용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500달러를 선뜻 빌려준 농장주 럼지의 호의로 도산은 직업소개소를 차려 그 지역의 과수원에서 일한 동포들을 모아 보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인노동자 가정들의 주거지와 독신 노동자 합숙소 등을 마련하는데 사용했다.
■사진에 나타난 럼지와의 인연
농장주 코르넬리우스 럼지와 도산 선생과의 인연이 밝혀지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리버사이드 시립박물관이 도산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던 중 도산이 1912년에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진 속의 도산 옆에는 오렌지 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박스에 새겨진 희미한 도안이 계기가 됐다. 그 도안이 농장의 이름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시립박물관 모세스 박사가 박물관에 소장된 1900년대의 그곳 농장들의 장비와 라벨 등을 뒤적여 끝내 박스에 새겨진 도안이 ‘알타 크레스타 그로브 ‘농장의 로고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을 계기로 도산과 ‘알타 크레스타 그로브’의 농장주 코르넬리우스 얼 럼지와의 관계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럼지는 1900년에 동부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대갑부로 당시 200에이커의 오렌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도 리버사이드의 빅토리아 애비뉴와 더블트리 길이 만나는 곳에 당시 농장주 럼지 일가 살고 있던 고옥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여전히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럼지 고택을 안내했던 홍명기 이사장은 “농장주 럼지는 도산 선생을 ‘미스터 안’이라 부르며 한인들의 지도자로 대우했다”며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정직과 성실을 강조한 도산 선생은 당시 백인들에게도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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