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으로 때우다 무죄로 풀려나도 일자리 잃고 양육권 뺏기고…
▶ 빨리 나오려 죄 없이 형량거래도
■ 돈 없는 피고는 재판 받기도 전에 범죄자로
볼티모어 토박이인 도미니크 토랜렌스는 4월28일 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물론 그가 범법행위로 쇠고랑을 찬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나긴 전과기록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폭력범죄로 기소된 적이 없었기에 금방 풀려나오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판사는 그의 보석금으로 25만달러를 책정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25만달러는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에게 폭행을 가해 사망케 한 혐의를 받고 있는 2명의 경관에게 각각 책정된 보석금과 같은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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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과자인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에 체포된 것은 4월12일 아침이었다. 마약 전과자인 그는 경찰을 보고 이유 없이 도망가기 시작했으나 곧 붙들려 경찰차로 끌려갔다. 당시 상황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 프레디는 체포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듯 심하게 다리를 절었지만 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30분 후 경찰차 밖으로 나온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1주일만인 4월19일 사망했다. 부검 결과 직접적 사인은 척추손상이었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흑인 주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토렌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4월28일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된 토렌스는 7만5,000달러의 보석금을 책정 받았다. 하지만 보석금 재심과정에서 과거 몇 차례 법원 출두명령을 묵살한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한 탓에 액수가 25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변호인은 토렌스가 시위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고 체포될 당시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현장 채증작업을 위해 경찰 헬기에 타고 있던 경관들이 그가 소방관들을 향해 벽돌을 던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반박했다. 판사는 그가 보석으로 풀려날 경우 공공안전에 위험을 주게 된다는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형사소송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불구속 기소를 원칙으로 한다. 형사 피의자나 피고인은 보석신청을 해 일단 구금상태에서 벗어난 후 재판을 받는다.
보석금 예치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피고가 직접 보석금을 현금으로 법원에 예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임 변호사나 가족을 통해 보석금 보증인을 고용하는 방법이다.
보증인은 피고에게 책정된 보석금 전액에 대한 지불보증을 서준다. 베일 본즈맨이라 불리는 보석금 보증인은 피고가 법정 날짜를 어기고 출두하지 않을 경우 60일 내에 피고를 찾아 감옥으로 돌려보내든지 아니면 보석금을 대신 지불해야 한다.
이들은 보증 보험사와 손잡고 일하면서 피고인, 혹은 그의 기족으로부터 보석금의 10%를 수수료로 챙긴다. 따라서 25만달러의 보석금이 책정된 토렌스는 베일 본즈맨에 2만5,000달러를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빈털터리인 그에게 2만5,000달러건 25만달러건 마련할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토렌스는 결국 몸으로 때우는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돈을 마련할 재간이 없기도 했지만 “나 하나 편하려고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갈 돈까지 모조리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제적 소외계층에 속한 단순시위 가담자에게 살인범에게나 책정될 무지막지한 보석금을 책정한 판사가 원망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4주를 구치소에서 버틴 그는 검찰이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를 중지함에 따라 풀려났다.
몸으로 때운 덕에 2만5,000달러를 절약한 셈이 됐지만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진다’는 것이 딱 그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여자 친구인 마게샤 브라운은 두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토렌스 대신 아기를 돌보아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용학교 수강도 포기해야 했고 덕분에 학자금으로 융자를 받았던 1만8,000달러가 날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아파트 월세가 준비되었을 리 없다. 하루아침에 길가에 나앉게 될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이 찾아든 것이다.
많은 변호사들과 법학자들은 볼티모어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시민들의 경우에서 보듯 보석금 제도는 불합리한 구석이 많다고 지적한다.
보석금을 장만할 길이 없는 가난한 피고인들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사실상 벌을 받게 된다.
보석금 제도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입각해 피고인에게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인신자유를 부여하는 것과 동시에 도주위험을 막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범죄자라도 돈이 있으면 설사 사회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 하더라도 구속을 피해 가는 반면 빈털터리 피고인들은 주변에 위험을 미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혈세로 유지되는 구치소에 갇히게 된다”며 보석금 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한다.
보석금을 예치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구치소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하더라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이들이 구치소에 들어가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고 가족은 종종 퇴거위기로 내몰린다.
그뿐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양육권을 빼앗기게 되는데 이들을 되찾아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증거부족 등의 이유로 기소중지가 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 때문에 많은 무고한 빈민 피의자들이 없는 죄를 인정하고 형량거래를 시도한다. 질질 끄는 재판과정을 생략하고 형량거래로 형기를 줄여 하루라도 빨리 사회로 복귀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결백과는 상관없이 일단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전과기록이 따라붙기 때문에 남은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다.
어떤 날이건, 보석금 낼 돈이 없어 구금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인들이 미 전역에 무려 500만명이나 된다. 연방 법무무 산하 국립교정원에 따르면 미국은 전 세계에서 재판 전 구금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다. 물론 이들 대부분이 흑인 빈민들이다.
이렇듯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사실이지만 판사들은 피고인들의 법원 출두를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 보석금 제도 만한 것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보석금 제도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형사사건 피고인에 대한 재판 전 인신구속은 지극히 제한적인 예외로 인정되어야 하며 불구속 재판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보석금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그릇된 인식을 부채질한다는 불만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석금 제도는 “형사 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될 뿐더러 인종적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심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런 혐의들에 대해 보석금 제도는 과연 유죄일까, 무죄일까.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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