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비서 겸 바디가드 역할로 ‘권력의 실세’ 대접... 보직 바뀐 후도 좋은 자리에 중용 탄탄대로 걸어
▶ 하지만 ‘주군’이 비리혐의 물러나자 줄줄이 좌천돼
제임스 헬몰드(왼쪽)가 2014년 1월 리 바카 LA카운티 셰리프국 국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리 바카의 운전기사 였던 헬몰드는 고속승진을 거듭했으나 리 바카가 물러난 후 좌천을 당했다. <사진출처-LA타임스>
■ LA카운티 리 바카 셰리프 국장의 사례
2003년 2월의 어느 날 늦은 시간. LA카운티 셰리프국 캠튼 사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사건 보고서 작성에 몰두하고 있던 조셉 페넬 경사는 상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즉시 이력서를 작성해 올려 보내라는 지시였다. 눈치 빠른 페넬은 조만간 보직인사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불과 며칠 뒤 그에게 새로운 자리가 주어졌다. 리 바카 LA카운티 셰리프국 국장의 운전기사 역이었다. 내심 화려한 승진을 기대했던 그는 그만 맥이 풀렸다. 고작 상사의 ‘운전 머슴’ 노릇을 하려고 셰리프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생각에 울컥 욕지기가 치밀었다. 가슴에 단 금빛 보안관 배지에 왠지 부끄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셰리프 국장의 운전기사는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자리였다. ‘국장의 남자’로 부름을 받은 뒤 2년 동안 페넬은 LA카운티 셰리프국 총수를 옆자리에 태운 채 광대한 관할지역을 종횡으로 누볐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국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기사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리바카 국장의 휴대전화를 보관하고 수행중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셰리프국의 최고위층 인사들이었다.
평소 같으면 경사 따위가 감히 말을 붙이기도 힘든 상대였지만, ‘갑’의 위치는 종종 리 바카의 이동 교환수 역을 맡은 페넬에게 돌아가곤 했다.
국장의 심기가 불편하다 싶을 때에는 “다음에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이 좋겠다”며 차단막을 쳤고 그때마다 셰리프국 2인자를 비롯한 실력자들은 십중팔구 “알려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의 충고를 따랐다.
공개행사에서 국장의 신변 안전을 챙기는것도 그가 맡은 업무의 일부였다. 말하자면 셰리프 국장의 운전기사는 수행비서와 바디가드의 역할까지 ‘1인3역’을 감당해야 했다.
조직 내에서 개인의 ‘권력’은 최고 실력자와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다. 권력자의 그림자로 지내다보니 그와 마주칠 때마다 친한 척 어깨를 두드리는 직장 상사와 동료들이 늘어났다. 더러는 국장의 귀에 전달되기 원하는 개인적 ‘무용담’을 그의 앞에서 주절주절 늘어놓기도 했다.
개인적인 인맥도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LA카운티 셰리프 국장을 보필하며 관내 행사장을 들락거리다 보니 웬만한 유력 인사들과는 안면을 트게 됐고, 필요에 따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커넥션이 형성됐다.
1만8,000명의 인력을 거느린 LA카운티 셰리프국 총수를 지근거리에서 장시간 관찰하는것은 조직의 현실적 작동원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가 본 리 바카는 ‘엘뽀요 로꼬’를 유난히 좋아하고 홈리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에고(ego) 덩어리였다.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그는 어마무시한 자부심과 함께 주변의 없는 자들에 대한 따스한 온정을 갖고있었다. 그의 결점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리 바카는 자신의 주변에 그의 방패가 되어줄만한 사람들을 모아 두꺼운 병풍을 쳤다. 정실인사는 이 같은 패거리 모으기의 필수적 수단이자 그의 몰락을 불러온 결정적 원인이었다.
리 바카는 2014년 1월 측근들의 연이은 스캔들 속에 쫓기 듯 권좌에서 물러났다.
LA카운티 셰리프국의 첫 흑인 국장 운전기사였던 페넬 역시 리 바카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운전기사 보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리 바카는 그를 친 손자처럼 대했다. 업무와 관련한 실책은 엄하게 나무랐지만 늘 따듯한 애정으로 그를 감싸주었다. 페넬 이전과 이후의 다른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 바카의 총아로 분류된 그의 기사들은 동우회를 만들어 보스의 각별한 사랑에 화답했다. 이들은 매년 리 바카를 귀빈으로 초청해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오찬모임을 가졌다.
현직 시절, 리 바카는 전직 운전기사들을 중용했다. 페넬과 그의 후임이었던 짐 헬몰드가 교도소 내 폭력을 다루기 위한 특별팀의 네 자리 가운데 두 자리를 꿰찬 것이 그 좋은 예다.
리 바카의 첫 번째 운전기사였던 팻 맥스웰은 상사를 모시고 1998년 당시 관용차였던 머큐리 마퀴스로 관내 지서와 정부 모임과 각종 커뮤니티 행사장을 오가며 7만마일을 달렸다.
LA카운티 셰리프국의 관할지는 무려 4,000평방마일에 달했다. 인터넷 지도가 없던 시절, 지도책 ‘토머스 가이드’에 의지해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관할 구역의 구석구석에 처박힌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맥스웰 역시 ‘주군’의 기사시절 그의 직위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거물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인맥이 쌓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우선 근무시간이 길었다. 기사의 공식 일과는 새벽 6시, 그 날의 국장 스케줄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큰행사가 잡혀 있을 때에는 무료함을 참아가며 차 안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자정을 넘기기 이전에 집에 들어간 것은 드물었다. 당연히 마누라와 얼굴을 마주할 시간도 없었다.
페넬의 아내는 남편이 너무 바빠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자 아예 간호사 일을 그만 두었다.
하지만 이들은 운전대를 놓은 뒤 승승장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헬몰드의 도약이 눈부셨다. 헬몰드는 한 차례 특진까지 하면서 46세에 부국장 자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실 인사와 측근 비리의 추문 속에 리 바카의 10년 아성이 무너지자 그의 기사들이 제일 먼저 된서리를 맞았다.
리 바카의 지명을 받아 국장직에 도전한 헬몰드는 예비선거에서 짐 맥도넬에게 대패한 후 국장대행이었던 존 스캇에 의해 즉각 좌천됐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역시 바카의 운전사였던 캡틴 엘리 베라를 사우스LA서에서 그보다 낮은 급지로 전보 발령했다.
베라는 몇 개월 전 고과평가에서 탁월한 상황 파악력과 업무 장악력을 인정받아 최고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전보발령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며 리 바카와의 과거 인연으로 말미암아 신임 국장의 취임을 앞두고 정리된 것이 분명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은 분명 실력으로 승부했지만 셰리프국 ‘내부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현재 LA카운티 남부 순찰국 커맨더로 근무중인 맥스웰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리 바카의 운전사로 일한 것이 경력에 마이너스가 됐다”고 푸념했다. 그는 리 바카 시대의 마감을 불러온 카운티 교도소 내 재소자 학대사건과관련, 특별조사위원회에 출두해 전 상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고 이로 인해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 후견인의 등에 칼을 꽂은 비열한 기회주의자 낙인이 찍혔다.
한편 실력위주의 공정한 인사를 선거공약으로 들고 나왔던 짐 맥도웰은 내부 e메일을 통해 국장 운전사를 공개 구인하는 것으로 개혁의 첫 걸음을 떼었다. 그 결과 클리퍼 해킷 경사와 여성인 제이닌 핸슨 경관이 2인 1조로 2부제 근무를 하는 국장 운전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맥스웰은 이같은 변화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제도에 변화를 주어봤자 국장의 운전자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각은 교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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