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맥도널드 등 대형 패스트푸드 업체 종업원들이 미 전역에서 임금인상 및 업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일일 동맹파업을 벌인 가운데 라스베가스의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시위대가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해 줄 것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시애틀 15NOW 운동서 시작
내달부터 순차적으로 15달러로
보잉·스타벅스 등 본사 몰려
경제 파급효과 클 것으로 분석
◎ 오바마 텐텐 법안 재추진
연방정부 최저임금 10.10달러로
월마트 등 기업들도 동참
영·독 등 각국 뒤따라 인상
◎ 저임금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은
논쟁 대상 아닌 생계문제
노벨상 수상 크루그먼 교수
“임금은 경제 아닌 정치적 선택”
에콰도르 이민 2세 아레이슬린 칸토스(27)의 미국 이민생활은 ‘가난과의 싸움’의 연속이다. 칸토스의 하루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바쁘다. 새벽 5시 일어나 두 곳의 파트타임 일자리를 오가며 하루 평균 10시간씩 주당 60~70시간을 일한다. 전문 주방용품점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데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퇴근할 때쯤이면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은 일주일에 400달러. 그런데 어머니와 같이 쓰고 있는 방 두 개짜리 뉴욕주 브루클린 아파트 월 임대료가 1,400달러다. 매주 지하철 카드로 30달러, 식료품 값으로 70달러를 쓰고 나면 남는 돈은 없다. 22년 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혈혈단신 미국 땅을 밟은 엄마는 죽도록 일만 하다 췌장이 망가져 최근 수술을 했다. 혈액순환이 힘든 엄마를 위해 구입한 모카신이 칸토스가 최근에 한 유일한 사치다.
칸토스는 엄마의 꿈을 이어 받아 “돈을 벌어 가족의 고향 에콰도르에 집을 사고 싶다”고 지난달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칸토스는 또“최저임금 인상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가족,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최저임금 인상 운동을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 최저임금 인상 세계적 추세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세계 곳곳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내 20개 주와 워싱턴시가 올해 1월1일부터 12센트(플로리다)~1.25달러(사우스다코타)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칸토스의 일터가 있는 뉴욕주도 최저임금을 8달러에서 8.75달러로 인상했다. 이에 따라 칸토스의 연 평균소득도 2,500달러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미 경제정책연구소(EPI)는 이번 최저임금 인상으로 250만명의 소득이 늘어난다고 추산했다.
미국 내 최저임금 인상 바람은 시애틀에서 시작됐다. 시애틀 시의회가 지난해 6월 올 4월부터 현 최저임금인 9.32달러를 기업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15달러로 올리는 안을 통과시킨 것. 지난해 시애틀을 뜨겁게 달군 ‘15 NOW’(이제는 15달러) 운동을 이끈 크샤마 사완트 시애틀 시의원은 “최저임금 인상이 빈곤에 시달리는 수십만명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애틀에는 보잉, 스타벅스, 코스코, 아마존 등의 본사가 몰려 있어, 다음달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인구 60만명 중 10만명 이상이 영향을 받아 미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클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해 공화당의 반대에 가로막혀 연방 정부 최저임금 인상에 실패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신년 국정연설에서 다시 최저임금 인상 이슈를 꺼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1년 내내 일해 1만5,000달러를 벌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며 “할 수 있음 한 번 해 봐라”고 최저임금 인상 필요성을 강조했다. 주 정부와 달리, 현재 미 연방 정부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달러로 2009년 이래로 변동이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 최저임금을 10.10달러까지 올리는 일명 ‘텐텐 법안’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들도 대세를 따르고 있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지난달 50만명에 달하는 풀타임,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9달러로, 그리고 내년 2월까지 10달러로 차례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또 다른 유통업체 TJ 맥스와 마샬의 모회사 TJX는 직원들의 최저임금을 상반기 중에 9달러로 올리고 내년까지 6개월 이상 근무자에 한해 시간당 임금을 10달러로 인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은 올해 최저임금을 3% 인상해 2년 연속 물가상승률을 웃도는 수준으로 올렸다. 이로써 전문가들은 노동자들이 체감하는 임금인상 효과가 2007년 이래 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독일 의회도 비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없앤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올해부터 시간당 8.5유로로 하는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스위스에선 지난해 5월 최저임금을 세계 최고 수준인 22스위스프랑(약 24달러)으로 높이는 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으나 부결됐다.
■ 경기 활성화 vs. 고용감소 논란
최저임금 인상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저소득층의 소비를 진작시켜 경기 활성화를 돕고 장기적으로 소득 불평등을 완화시킨다는 입장과 고용주들이 일자리를 줄일 것이라는 해묵은 논쟁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월스트릿 저널은 최저임금 인상 지지자들이 모범사례로 꼽는 호주에서 최근 최저임금 인상 부정론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호주는 성인 노동자 최저임금이 16.87호주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도 실업률이 낮은 이상적인 모델로 주목 받았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광ㆍ공업에 의존하던 호주 경제가 침체되자 2008년 초 4%던 실업률은 현재 6.1%까지 치솟았다. 호주 정부 경제자문관을 지낸 로스 가너트는 “높은 최저임금이 일자리 증가를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 의회예산국(CBO)도 지난해 2월 연방 정부 최저임금이 10.1달러로 인상되면 90만명이 빈곤을 탈출하겠지만 일자리 50만개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반면 최저임금 인상 지지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성장은 물론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반박한다. 이들에 따르면 소비성향이 강한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면서 경기가 활성화되고,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의 기업 충성도를 높이면서 이직을 감소시켜 기업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도 최근 “월마트의 최저임금 인상은 미국의 소득 불평등 정도를 완화시키고 중산층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보수주의자들은 고용시장도 다른 상품 시장처럼 수요공급 원리가 적용되고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반론도 따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근로자가 얼마를 받느냐는 사회ㆍ정치적 힘에 의존하고 있다”며 임금은 경제원리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최저임금 인상 찬성론자들은 저임금 노동자의 처우개선이 국가 재정을 탄탄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임금 노동자들 대부분이 무상으로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 푸드스탬프나 메디케이드 같은 국가 보조금을 지원 받는데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국가의 세금으로 들어가던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월마트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푸드스탬프로 생활한다며 이를 ‘월마트 세금’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국제 구호단체인 옥스팜이 지난해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의 4분의 1은 자신이 번 돈으로 스스로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정부 지원을 받거나 빚을 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월마트의 임금 인상으로 미국 경제회복이란 퍼즐에서 빠져 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완성됐다”고 긍정 평가했다.
■ 정치적 논쟁 대상 아닌 생계문제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런 최저임금 인상 논쟁이 쓸 데 없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최저임금은 논쟁 대상이 아닌 생계와 직결된 문제다. 시애틀의 15 NOW 운동 현장에선 “우리는 생활할 수 있는 만큼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가장 많이 들렸다.
패스트푸드 체인인 파파이스에서 일하는 리타 디아스(26)는 “임대료와 식대를 내고 돈이 남아야 교통비로 쓰고 여의치 않으면 3마일을 걸어다녔다”며 최저임금 인상분은 교통비로 쓸 것이라고 말했다. 디아스가 사는 매서추세츠주는 올해 최저임금을 1달러 올린 9달러로 책정했다. 아칸소주 여관에서 일하는 샤나 티픈(43)은 “25센트가 인상돼 피부가 민감한 손주에게 고급형 기저귀를 사주게 됐다”고 말했다.
주 정부가 최저임금을 2017년까지 8.5달러로 단계적으로 올리기로 한 아칸소주의 최저임금 인상운동연합 의장 스티브 코플리는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복잡한 게 아닌 단순한 것이다”라며 “바로 사람들이 열심히, 힘들게 일하지만 여전히 생활을 꾸리기에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1968년 미국에선 최저임금을 받는 한 명의 풀타임 노동자가 3인 가구를 부양했다면 지금은 2인 가구를 부양해도 빈곤층으로 떨어진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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